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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이끌어 간 기업가, 이병철

안재욱 | 2015-02-03 | 조회수: 6,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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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결정

 

1983년 2월 일본 도쿄의 오쿠라 호텔.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사업 진출 여부를 놓고 며칠째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마침내 서울에 있는 중앙일보 홍진기 사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반도체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누가 뭐래도 밀고 나가겠다.” '도쿄 선언’이었다. 그의 나이 74세였다. 오늘날 삼성이 메모리반도체 시장점유율 세계 1위, 전체 반도체 시장점유율에서는 인텔에 이어 세계 2위인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고민이 많았다. 수많은 위기를 넘겨 왔지만 반도체 생산 한 개 라인을 건설하는데 무려 1조원이나 드는 사업을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반도체는 바로 수익을 볼 수 있는 사업이 아니었고 잘못되면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질 수도 있었다. 일본으로 오기 전  “돈벌이만 하려면 반도체 말고도 많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고생하고 애를 쓰냐고요? 반도체는 국가적 사업이고 미래 산업의 총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온 터였다. 사실 한국을 떠나 올 때 반도체를 생산하기로 이미 절반은 결심했지만 임원들의 반대도 많았고,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자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오쿠라 호텔은 이병철 회장이 무언가 깊이 생각하여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찾는 곳이었다.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에 소위 꽂힌 것은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 밸리에 있는 휴렛패커드 의 컴퓨터 반도체 공장을 둘러 보고난 뒤였다. 컴퓨터 하나로 모든 일을 하는 휴렛팩커드 사무실을 보고 그는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서 그것이 반도체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부를 창출할 미래의 먹거리가 반도체에 있다는 것을 통찰해 냈다. 
 
이병철 회장이 미국을 방문하게 된 계기는 1982년 3월 보스턴 대학에서 경영학 명예박사학위를 받기 위함이었다. 미국 방문 동안에 많은 미국의 최고경영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의 실리콘밸리, IBM, 휴렛팩커드의 컴퓨터 반도체 공장을 둘러보았던 것이다.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사업 기획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반도체 중 메모리 분야는 일본이 미국보다 앞선다는 내용을 보고 반도체를 생산하기로 결심했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일본이 미국보다 앞선 이유가 일본사람이 손재주가 더 뛰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손재주라면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일본이 하면 우리도 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도쿄 선언에 대해 세상의 반응은 냉담했다. 삼성이 64KD램을 개발하려면 적어도 20년은 걸릴 것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담담하게 반도체 사업을 추진했고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바로 그해 64KD램 개발을 완료했다.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 개발이었다. 세상의 비웃음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2013년 현재 삼성이 보유하고 있는 세계 시장점유율 1위 제품은 모두 21개다. 메모리 반도체는 20년 이상, 플래시메모리는 10년 이상, TV 판매량은 8년 연속, 세계 LCD 패널 시장에서는 11년 연속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휴대폰 시장에서도 2012년 노키아와 애플을 제치고 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2009년 삼성전자는 세계 최고의 전자 기업으로 등극하며 1위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세계 전자업계를 제패해 오던 미국 HP(휴렛패커드)와 독일 지멘스는 2, 3위로 밀려났다. 삼성전자는 세계적인 브랜드 컨설팅 업체 인터브랜드가 발표한 '2014 글로벌 100대 브랜드(2014 Best Global Brands)’ 세계 7위를 차지했다. 휴대폰 분야에서는 갤럭시 S와 노트, 기어 S, 기어 VR 등 스마트폰과 다양한 웨어러블 기기를 선보이며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물론 삼성이 이렇게까지 성장한 것은 이병철 회장의 덕만은 아니다. 그의 자리를 이어받은 이건희 회장의 공헌이 무엇보다 컸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 대에 삼성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병철 회장이 마련해 놓은 기반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38년 3만원(지금 돈 약 35억 원 정도)의 자본금과 직원 40여명과 함께 대구시 수동(현 인교동)에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시작했던 삼성이 2013년 순이익이 221억 달러, 총매출액 3,049억 달러, 총자산 5,295억 달러, 자기자본 2,312억 달러, 임직원 수가 489,000명에 달하는 거대 기업으로 컸다.  전자, 비료, 유통, 항공, 정밀 등의 다양한 산업 육성을 통해 한국 경제를 견인하며, 현재 전자, 중공업·건설, 화학, 금융, 서비스 산업을 통해 70여개 국가, 500여개 세계 속 거점에서 활동하는 글로벌 그룹으로 성장했다.  

 

기업가의 결정은 고독하다. 아직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기 때문이다. 상업세계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그 만큼 위험이 따르고 자연과학의 세계와는 달리 규칙적인 함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알려진 과학적 지식도 중요하지만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여러 가지 자료와 경험을 바탕으로 결정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사전에 아무도  알 수 없다. 자신조차 모른다. 다만 주관적인 판단을 바탕으로 예측할 뿐이다. 그것이 기업가이고 기업가 정신이다. 이병철 회장은 그 길을 갔다.


 

탁월한 기업가 정신

 

해방 후 1951년 이병철 회장은 삼성물산주식회사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철이 부족한 일본에 고철을 모아 수출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거기서 얻은 수익으로 홍콩 등지에서 비료와 설탕을 수입해 국내에 팔아 더 수익을 올렸다. 이병철 회장은 무역업을 통해 번 돈을 이용해 제조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직원들의 반대가 심했다. 돈을 잘 벌고 있는 무역업을 그만 두고 전쟁으로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왜 제조업을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막대한 설비투자가 필요했고 기술적인 문제도 안고 있었다. 잘못하면 한 번에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병철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이병철 회장이 지난 10여 년 동안 사업을 하면서 얻은 교훈은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치밀한 조사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해방 전 정미소와 운수회사의 실패로부터 얻은 귀중한 교훈이었다. 그래서 그는 직원들을 동원해 각계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했다.

 

사전조사 결과 수입대체 효과와 장래성이 있는 품목으로 종이, 페니실린, 설탕으로 압축되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설탕이었다. 설탕을 선택한 이유는 다른 것에 비해 하루라도 더 빨리 착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3년 4월 삼성물산주식회사에 제당 사무소를 설치했다. 회사 이름을 '제일제당공업주식회사’로 정했다. '제일’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한국의 No.1 회사여야 한다는 이병철 회장의 의지가 담긴 것이었다.
 
그러나 공장 건립은 쉽지 않았다. 일본 제당업계는 강력한 라이벌을 견제하려 했고, 이승만 정부의 반일정책으로 일본으로부터 기계수입 허가를 받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마침내 일본에서 기계를 들여왔지만, 기계를 조립할 수 있는 전문가가 없었다. 그리하여 공장장과 함께 기계를 판매한 '다나카기계’를 방문한 이병철 회장은 직접 기계와 기계운전, 공장 운영 등에 대해 공부하며 배웠다. 그리고 귀국 후 우리나라 기술자들을 데리고 기계를 조립해나갔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드디어 6,300킬로그램의 설탕이 처음으로 만들어져 시장으로 트럭에 실려 나갔다. 그날이 바로 1953년 11월 5일이었다. 이병철 회장에게 감격적이고 역사적인 날이었다.
 
제일제당의 설탕 가격은 수입설탕 가격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수입설탕의 가격이 한 근에 300환, 제일제당의 설탕은 100환이었다. 제일제당이 설립되던 1953년 설탕 수입량이 23,800톤이었다. 수입가격은 톤당 35달러였다. 100% 수입에 의존하던 것이 제일제당 설립 1년 뒤에 51%로 떨어졌고, 2년 뒤에 27%, 3년째에 7%로 떨어졌다. 엄청난 외화가 절감되었다. 제일제당은 1955년 설비를 늘려 생산량을 두 배로 늘렸다.
 
이병철 회장은 설탕 생산 2년 만에 거부가 되었다. 그러나 위기가 찾아왔다. 1955년과 1956년 사이에 동양, 삼양, 대한 등 7개 회사가 설탕 생산에 뛰어 들어 들면서 공급과잉이 발생했다. 게다가 설탕에 대한 물품세가 3배나 올랐다. 소비가 확 줄었다. 도산하는 회사가 생기기 시작했다. 제일제당도 거의 도산직전에 몰렸다.
 
이 경영위기를 극복해 나가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직원 수를 줄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그리하지 않았다. 1,000명에 이르는 직원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는 회사가 어려워졌다고 가족 같은 직원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직원 수를 줄이는 대신 다른 방안을 택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밀가루 생산이었다. 그가 밀가루를 생산한다고 하자 제일제당 경영진이  반대했다. 당시 밀가루 시장 역시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영진은 제과업을 원했다. 과자를 만들면 설탕이 많이 필요하니 서로 도움이 될 것이고, 당시 과자를 만드는 회사들의 규모도 작고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승산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회사가 궁지에 몰렸다고 제과업으로 손실을 메꾸는 것은 기업가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러분 말이 맞습니다. 제과업은 우리가 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살자고 그 작은 회사들을 죽여야 하겠습니까? 나는 돈이나 많이 벌자고 기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고요.”

 

밀가루를 만들면 당장은 더 큰 어려움에 처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분명히 제당사업과 서로 도움을 주면서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병철 회장은 경영진을 설득하여 1957년 설탕제조설비에 제분설비를 더했다. 그리고 1958년부터 밀가루를 생산 판매했다. 첫해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1959년 우리나라 전체 밀가루 생산량의 약 1/4을 공급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병철 회장이 밀가루를 선택한 것은 당장의 이익을 고려하기 보다는 기업가로서 제일제당을 종합식품회사로 성장시키기 위한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내린 결정이었다. 이병철 회장의 바람대로 제일제당은 국내최고의 식품회사로 성장했다.

기업가 정신이란 바로 상업세계의 불확실성을 떠맡는 정신을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회피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기업가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불확실성을 이윤 기회로 포착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기회를 인식하는 것이 기업가의 정신이다. 성공적인 기업가는 다른 시장참가자들이 채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러한 기회를 보는 것은 전형적으로 탁월한 상상력과 비전 그리고 창의성에 기인한다. 이병철 회장은 이런 능력을 갖춘 기업가였다.


 

시대를 앞서가다

 

이병철 회장은 제일제당의 설비를 늘리기로 하고 나서 바로 '방적업’이라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다. 당시 밀수에 의존하고 있는 양복지를 국산화해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리하여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이번에는 국내제일이 아니라 세계제일의 상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공장규모를 두고 임원진들과 또 갈등을 빚었다. 대부분의 임원들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우선은 작은 규모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규모를 늘려가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대규모 최신식 공장을 고집했다. 작은 규모가 단기적으로는 유리하지만 크게 만드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일모직 설립 역시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차관문제, 기계도입 문제, 공장건설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골덴텍스다. 첫해에는 5억 환이나 적자를 봤지만 골덴텍스 홍보와 품질 향상에 주력한 결과 차츰 외국산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평판을 얻으며 판매량이 늘었다. 혼수품으로도 인기가 높았다. 시장의 70%를 점유하여 제일모직이 우리나라 섬유산업을 선도하는 회사가 되었다. 제일모직으로 인해 외제 양복지가 서서히 이 땅에서 사라지며 연간 25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외화를 절약할 수 있었다. 또한 제일모직은 우리나라 국민 의복 생활에 새바람을 불어 넣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은 그렇게 우리나라 국민들의 삶을 개선시켰다.
 
이병철 회장은 제일모직 건설과정에서 작업환경이 좋아야 능률도 오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복지시설에 공을 들였다. 모직은 고가품이므로 만드는 사람의 자질이 뛰어나야 하고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공들이 좋은 환경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일해야 작업능률이 오르고 좋은 품질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이병철 회장은 경영진에게 최상급의 환경을 갖춘 여공 기숙사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당시로는 획기적인 스팀 난방과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했고, 목욕실, 세탁실, 다리미실, 휴게실 등의 최고급 부대시설도 만들도록 했다. 복도는 고급스런 회나무를 깔아서 차분한 느낌이 들도록 배려했고, 연못과 분수까지 만들었고 공장 곳곳에 좋은 나무를 심어 공장전체를 잘 다듬어진 정원으로 꾸몄다.
 
제일모직이 문을 연 시기는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 이하였던 1950년대 중반으로서 다수의 국민들이 봄이면 보릿고개에 허덕이던 시절, 국내 최고의 기숙사 시설에 봉급도 최고 대우였다. 여공들에게는 꿈의 공장이었다. 그러자 여공 모집광고가 나면 지원자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제일모직 입사는 보통 10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고, 한 번 입사한 직원들은 웬만해서는 그만 두는 일이 없었다.
 
“일하는 환경이 나쁘면 작업에도 싫증을 느끼기 쉽고 이 때문에 능률이 저하되거나 직장을 이탈하기도 쉬워 진다. 그것은 바로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다. 누구나 웃는 낯으로 즐겁게 일 할 수 있을 때 능률도 오르고 또 직장에 대한 애착도 생긴다. 그것은 거시적으로 볼 때 사회에 대한 봉사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곧 여직공들의 능률이 오르면 그만큼 생산비가 낮아지고 원가도 따라서 낮아지는 것이다.”(1976. 6. 재계회고(서울경제신문)에서 )
 
이병철 회장이 기숙사를 잘 지으려 했던 데는 일본 유학시절 읽었던 호소이 와기조의 <여공애사>라는 소설이 준 영향이 컸다. 이 소설은 새벽 3시부터 오후 6시까지 비참한 상황에서 가혹하게 일하는 여공들의 일상을 그린 것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이 그런 비참한 환경에 놓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최상급의 쾌적한 시설을 갖춘 기술사를 지은 것이다.
 
이병철 회장은 기숙사나 공장 조경, 복지에 많은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4.19 이후 여공들의 '악덕 기업주 규탄’ 데모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사업 전개과정에서 '노조가 필요치 않은 삼성’이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그는 종업원이 회사에 애착을 갖도록 신경을 써주고 보살펴 주면 노사협조는 저절로 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종업원의 생계 대책에 대해서 늘 경영자는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극심한 인플레 상황에서는 월 10만원으로 생활하기가 어렵다. 종업원들이 열심히 애사심을 가지고 정직하게 일하게 하는 방법은 그들의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 다음 교육으로 그들을 가르쳐서 훌륭한 사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 1980. 12. 22. 정례사장단 회의에서

 

“사원출자제는 사원들의 의욕을 높여서 열심히 하면 결국 그 대가가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어 회사 경영에는 더 없이 좋은 제도라는 것을 '삼성물산공사’에서 볼 수 있었다.”
-1980. 7. 3. 전령련 강영(최고경영자연수회)에서

 

“노사문제로 사회가 어려워진다면 기업하는 사람이나 그 회사를 위해 일생을 바쳐 일하려는 모든 종업원에게 커다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노사가 협력하지 않으면 기업은 망하게 되는 것이다. 해방 이후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우리나라 경제가 이 정도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도 노사 간에 힘을 합쳐 열심히 기업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노사 문제도 상호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1982. 10. 12. 전경련 좌담회에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충분한 임금이 노동자와 그 가족에 중요하지만 충분한 임금을 지급하는 것은 역시 고용주에게도 이익이다. 임금이 높으면 노동자들은 더 잘 먹고 건강해지고, 저축하고 자신의 처지를 개선시키려는 기대를 갖고 있다. 그것이 더 열심히 일하게 만들고, 노동자들이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 그들은 더욱 건강해지고 더 생산적이 될 수 있다.”

 

이병철 회장이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 대우와 좋은 작업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결국 기업에 이롭다는 사실을 통찰한 기업가다.

 

사실 1960년대 한국의 경제상황과 기업문화와 비교해 볼 때 이병철 회장은 확실히 시대를 앞선 생각을 했고, 이것은 다른 기업들의 경영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한국의 기업문화를 바꾸는데 크게 기여했다.
    

기업경영의 교과서

 

1968년 1월 1일 이병철 회장은 경영 일선으로 복귀했다. 한국비료사건 이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1년여 동안 조용히 자연농원에서 칩거하다가 회사로 돌아 온 것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복귀하자마자 개발부를 새로 만들어 '전자산업’에 대해 조사하도록 했다. 그의 특유의 경영방식에 따라 새로운 사업에 대한 타당성 조사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함이었다.

 

당시는 흑백텔레비전 시대였다. 흑백텔레비전이라고 할지라도 매우 비싸 웬만한 월급쟁이는 구입할 엄두가 나지 않는 품목이었다. 또 세계 전자산업은 미국, 유럽, 일본이 주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껏해야 외국산 부품을 들여와서 조립하는 수준의 기업들만 몇 개 있었다. 그래서 전자산업에 대한 비전이 그리 크지 않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기술혁신과 대량 생산을 해 가격을 낮추고 수요를 창출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병철 회장은 일본으로 건너가 산요공장을 비롯한 일본 전자업계를 둘러보았다. 일본의 전자산업의 규모에 자극을 받은 이병철 회장은 산요공장보다 단 1평이라도 더 크게 공장을 짓도록 한다. 역시 임직원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이병철 회장은 임직원들을 설득하여 수원의 매탄동에 14만 5,000제곱미터의 땅을 공장부지로 매입했다. 삼성이 부동산투기를 한다고 여론이 들끓었지만 이병철 회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1969년 12월 삼성이 50% 출자하고, 일본 산요전기가 40%, 스미토모상사가 10%를 출자하여 '삼성산요전기’를 설립했다.

 

삼성이 일본 산요전기와 합작을 통해 삼성전자 설립을 준비하자 기존 전자 업체들이 대대적으로 반대했다. 삼성은 텔레비전과 라디오 생산량 중 15퍼센트만 국내에서 팔고 나머지는 모두 수출하겠다고 했지만 15퍼센트도 허용하지 말아야한다고 했다. 가뜩이나 좁은 시장에 삼성까지 들어오면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정부가 전자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생산물량 전부를 해외에 수출한다’는 조건 하에 삼성의 전자산업 진출을 허용했다. 이로써 1958년 금성사가 설립된 지 10여 년 만에 삼성이 후발주자로 전자업계에 뛰어들면서 금성(지금의 LG)과 피할 수 없는 경쟁 관계가 되었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전자산업으로 뛰어들었지만 라디오, 세탁기, 텔레비전 등 가전제품에서  삼성은 항상 금성에 뒤졌다. 만년 2위였다. 항상 1등 제품을 만들고자 했던 이병철 회장은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게다가 합작투자 했던 산요전기가 적극적이지 않았다. 텔레비전 공장을 짓는 데도 잘 협조하지 않고 기술제휴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조립한 제품에는 삼성이 아닌 산요전기 상표를 붙여야 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이병철 회장은 1972년 텔레비전 공장 건설이 끝나자 산요전기의 투자 분을 모두 인수했다. 산요전기와의 합작을 청산하고 단독으로 텔레비전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했다. 그런데 이것이 아주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1973년 말 삼성텔레비전의 국내시판이 허용되면서 서서히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다.

 

삼성은 다른 업체들이 흑백텔레비전 판매에 열중할 때 컬러텔레비전을 개발했다. 1974년 국산 컬러텔레비전 1호를 생산해나는데 성공했다. 컬러텔레비전을 생산했지만 정부는 계속 흑백텔레비전 방송을 고수했다. 그러다가 1981년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면서 삼성은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1984년 국내텔레비전 시장에서 처음으로 1위에 올랐다. 그 때 만들어진 컬러텔레비전이 '이코노빅’이었다. 그것은 절전형 프리볼트 텔레비전이었다. 1982년 보스턴 대학에서 경영학 명예박사학위를 받게 된 것도 미국에서 인기가 매우 높았던 '이코노빅’ 때문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기업경영에서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실천했다. “기업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사람이 기업을 움직인다.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사람이다. 또 그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은 기업이다.” 그리하여 이병철 회장은 좋은 인재를 등용하는데 힘썼다. 그리하여 당시에 파격적인 사원 공개채용 제도를 실시했다. 사원 공개채용은 국내 최초였다. 그리고 사원선발 면접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본인이 직접 했다.

 

“얼굴을 보고, 말 몇 마디 듣고 그 사람의 인품을 제대로 가려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나는 재기에 치우친 듯한 젊은이보다는 성실하고 온후한 인상을 주는 사람에게 더 호감이 간다. 나는 채용기준에 있어 학력 50점, 인물에 50점씩 배정한다. 인물은 용모 단정하고 건강하고 능동적인 성격을 우위에 둔다. 이 점은 필기시험 성적에 치중하는 타사와는 다르다. 학과성적이 좋다고 해서 꼭 훌륭한 인재라고 할 수는 없다.”
-<호암 어록> 중에서

 

당시 친척들 중에 큰 사업을 하면서 자리 하나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그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친척들을 잔뜩 들여 놓은 회사치고 변변히 돌아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혈연, 학연, 지연을 배제하고 어디까지나 능력위주로 사람을 썼다. 그리고 이병철 회장은 송나라 역사를 적은 <송사>에 나오는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말고, 한 번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疑人勿用, 用人勿疑)’는 말을 자신의 철저한 경영철학으로 삼았다.

 

이병철 회장은 좋은 인재를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을 더욱 더 좋은 인재로 육성하는데도 정성을 쏟았다. 그는 인재를 육성하지 못하는 경영자는 부실경영자로 생각할 만큼 인재 양성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974년에 인사고과제도를 체계화하고 1982년에 국내 최초로 그룹연수원을 만들었다.
 
“국가발전이 탁월한 정치가에 달려 있다면 기업의 발전은 유능한 경영자에 달려 있습니다. 내 일생의 80%는 인재를 모으고 교육시키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가 키운 인재들이 성장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고 좋은 업적을 쌓는 것을 볼 때 고맙고 반갑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이병철 회장은 인재육성뿐만 아니라 인재관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인재관리 요체는 신상필벌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공을 세운 사원에게는 상하를 막론하고 과감하게 경제적 보상과 파격적인 승진 혜택을 주었다. 이런 경영원칙은 열정과 야망이 있는 직원들에게 강한 동기를 부여했다.

 

“나는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모든 일은 사람에게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출발했고 지금도 그 원칙을 일관하고 있다. 우리 직원들이 나를 생각하고 대접하고 있지만, 나는 인재라고 기억되는 사람을 그들이 나를 대접하는 것보다 수십 배로 더 생각해준다. 그런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놓고 그들의 장래와 생활안정을 보장한 후에 모든 일을 떠맡겨버리는 것이 바로 경영의 요체라고 생각한다. 즉 성실하고 책임질 줄 아는 사람, 더 욕심을 낸다면 급할 때 판단이 빠르고 부하들이 따를 수 있는 덕망까지 갖춘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위임해버리는 것이다.”
-1977. 5 <사보 삼성>에서

 

기업의 궁극적 목표는 생존과 지속적 성장이다. 오랜 동안 계속 이윤을 얻지 못하면 기업은 시장에서 퇴출되고 만다. 그래서 기업은 이윤을 늘리려고 많은 노력을 한다. 기업이 장기적으로 이윤을 늘릴 수 있는 방향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수입을 늘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용 절감이다. 

 

기업의 수입이 늘어나는 것은 가격이 오르는 경우와 판매량이 증가하는 경우다. 따라서 기업이 가격을 올리는 것이 수입을 늘리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기업이 가격을 올림으로써 수입이 증가할 수 있는 것은 소비자에 달려 있다. 가격을 올리더라도 그에 따른 소비량 변동이 크지 않을 경우에 수입이 증가한다. 한편 가격을 올리지 않더라도 판매량이 증가하면 기업의 수입이 증가할 수 있다. 판매량 증가 역시 소비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소비자들이 많이 사주면 수입이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기업의 수입은 소비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소비자들이 그 기업의 제품을 반복적으로 구매해주며 구매를 늘릴 경우에만 기업의 수입이 유지되며 증가한다.

 

그리하여 기업은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한다. 첫째, R&D에 투자하고 품질관리를 통해 질 좋은 제품을 생산하고, 둘째, 고객에 대한 서비스 제공을 위해 종업원들을 교육하고 훈련하여 인력을 관리하며, 셋째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광고와 홍보를 통해 이미지 관리를 하고, 넷째, 디자인, 조직관리, 경영방법 등에서 혁신을 추진한다.

 

또한 비용이 절감되면 이윤이 증가하기 때문에 기업 역시 비용을 절감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한다. 첫째, 값싸고 질 좋은 원자재를 구입하려고 하며, 둘째, 능력 있는 근로자를 고용하고 근로자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교육과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넷째, 비용절감을 위한 R&D에 투자한다. 

 

이병철 회장은 이러한 기업의 본질과과 원리를 통달한 기업가다. 그리하여 그는 기업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수입을 늘리고 비용을 줄이면서 이윤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발견하고 실행했다. 이병철 회장의 경영 곳곳에 이러한 원리들이 배여 있다. 많은 기업들이 그의 다양한 기업경영방법을 모방하며 따랐다. 그가 한국경제 전반에 미친 영향도 크지만 한국의 기업세계와 기업문화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가치창조자

 

우리는 가치를 창출하며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하면 의례 화가나 조각가를 떠올린다. 기업가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기업가는 화가나 조각가와 마찬가지로 가치를 창출하며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이다. 화가나 조각가는 자갈과 바위, 나무, 뼈 등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그것들을 결합하여 손, 얼굴 등과 같은 미술작품을 만들어 낸다.

 

기업가는 주철, 고무, 유리, 프라스틱, 섬유 등의 원자재와 노동력을 가지고 그것들을 결합하여 자동차, TV 등과 같은 제품을 만든다.

 

화가나 조각가의 미술작품에 대한 가치는 그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 작품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치가 창출되어 창조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그 작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 작품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헛된 노력을 한 것이며, 귀중한 재료들을 낭비한 꼴이 된다. 마찬가지로 기업가가 만들어낸 제품에 대해 소비자가 가치를 부여할 경우에만 판매가 되고 이윤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소비자가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팔리지 않아 손실을 낳고 우리 사회의 귀중한 자원을 낭비한 꼴이 된다. 이윤은 가치창조의 신호이며 사람들을 이롭게 한 결과이다. 

 

이러한 점에서 미술작품을 만드는 화가나 조각가의 활동이 창조적이듯이 제품을 만드는 기업가의 활동 역시 창조적인 활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화가나 조각가의 활동은 고상한 가치를 창출하는 것으로 높이 평가하는 반면 기업가의 활동에 대해서는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저급한 것으로 폄하하여 부정적이기까지 하다. 이병철은 모직사업에 뛰어들면서 기업가에 대한 세간의 왜곡된 시각에 대해 아쉬운 심정을 토로했다.

 

“황무지에 공장이 들어서고 수많은 종업원이 활기에 넘쳐 일한다. 쏟아져 나오는 제품의 산더미가 화차와 트럭에 만재되어 실려 나간다. 기업가에게는 이러한 창조와 혁신감에 생동하는 광경을 바라 볼 때야말로 바로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더없이 소중한 순간인 것이다. 기업가의 이러한 끊임없는 도전과 의욕이 국가경제 발전에 하나하나 초석이 되고 원동력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기업가를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기업가가 큰 뜻을 세워 사업보국의 사명감을 갖고 새 일을 시작해도 한쪽에선 사시의 눈으로만 바라보고자 한다. 기업가들이 탐욕에 빠져 부도덕한 일을 한다고 헐뜯으며 비판하려 드는 것이다. 예술가의 사명감과 노력에는 뜨거운 박수를 아끼지 않으면서 기업가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인색한지 모르겠다.”
- 호암자전 71~72쪽

 

광복 직후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오늘날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가 넘는 국가로 성장한 데에는 기업과 기업가의 역할이 가장 크다. 1950-1960년대 산업기반이 일천하여 수출품이라고 해야 철광석, 무연탄, 가발 등에 불과했던 우리나라가 전자, 중공업, 반도체, 화학 등 대부분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국가가 된 데는 끊임없이 혁신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온 이병철 회장과 같은 기업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의 거성

 

이병철 회장의 경영철학은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경영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호암 자전에 보면 확고한 '사업보국(事業報國)’ 정신이 나타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행히 나는 기업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왔고, 나의 갈 길이 사업보국에 있다는 신념에 흔들림이 없다.”

 

이병철 회장은 사업보국의 뜻을 펼치기 위해 해방 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세워 수입대체산업 육성에 주력했다. 1960년대에는 비료, 전자, 유통, 의료, 섬유산업에 진출하며 대한민국의 경제 근대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수출증대와 함께 중화학 공업과 방위산업, 1980년대에는 전자, 항공, 정밀, 화학 등 기술 산업의 육성을 통하여 한국의 기간산업을 발전시켰다.

 

 이병철 회장이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이 인재육성이었다. 자원이 부족한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 인재육성임을 간파하곤 인재발탁과 인재육성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인재육성에 대해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는 1982년 보스턴 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식 기념강연에서 한 “'삼성은 인재의 보고'라는 말을 세간에서 자주하는데 나에게 있어서 이 이상 즐거운 일이 없다.”는 말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인재제일주의는 1980년 7월 3일 전경련에서 “인재를 잘 선택하는 것은 사업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이다. 나는 지난 20년간 대학을 나온 사람을 신규채용 할 때는 만사를 제쳐 놓고 면접에 참여했다.”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삼성이 국내 최초로 공개채용제도, 사원연수제, 인사고가제, 사원출자제도 등을 실시한 것은 이러한 인재제일주의가 반영된 것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끊임없이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그는 철저한 조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하였다. 그의 조사와 연구는 조직적이고 치밀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그리했다. 반도체도 그러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병철 회장은 기업은 끊임없이 변신하지 않으면 남아 있을 수 없고, 끊임없이 품질을 개선하여 혁신적으로 변신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보았다. 철저한 조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기업환경의 변화를 신속하게 파악하여 시장적 기회를 포착하면서 끊임없이 변신하며 삼성을 키워 나갔다. 이러한 그의 경영철학은 1985년 4월 2일 KBS와의 방송 대담에 잘 드러나 있다.
  
“기업은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제일제당, 제일모직을 세울 당시 우리나라는 6.25로 폐허가 되어 온 나라가 극심한 물자난에 허덕이며 생필품 수입에 의존하고 이었다. 물자가 풍부한 지금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될지 모르나 당시로는 생필품의 수입대체를 위해 생산 공장을 짓는 것이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문제였다. 기업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시대의 여건과 상황에 맞는 업종을 선택해서 합리적으로 경영해야 한다. 국가경제에는 경공업도 필요하고 중공업도 필요하다. 문제는 경쟁력 있고, 저렴하고 질 좋은 제품을 만들어 기업을 튼튼하게 키워나가는 데 있다고 본다.”

 

이병철 회장은 이러한 기업경영을 통해 우리나라 기업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새로운 기업문화를 만들었고, 현대적 경영을 통해 다른 기업의 전범이 되었다. 한국경제 발전의 주역이었으며 거성이었다.

 


 

<참고문헌>

 

김용삼, “이병철”, 『한국의 자본주의개척자들』, 월간조선, 2003, 399-465.
박시온. 『이병철처럼』, FKI미디어, 2012.
송년식. 『대한민국 기업인 이병철』, 2007.
이병철. 『호암자전』, 중앙일보사 1968.
호암재단. 『호암어록-기업은 사람이다』, 1997.

 

 

 

 

 

안재욱 |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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