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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장보고를 꿈꾼 김재철

김홍균 | 2015-10-16 | 조회수: 4,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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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재철은 누구인가?


동원산업의 김재철 회장은 1934년 3월 30일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부친 김경묵(金敬黙) 선생과 모친 김순금(金順今) 여사와의 6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고향에서 강진 군동공립보통학교(23회, 1948), 강진농업중학교, 강진농업고등학교를 다녔다. 당진이 지형상 바다를 끼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농업고등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에 대해 의아해 할 수 있겠으나 당시 주민 대부분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동네에서 똑똑한 아이들은 농업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김재철 회장이 청소년시절까지 살아 왔던 배경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된 것은 고등학교 은사님 권유 때문이었다. 강진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우등생이었던 청년 김재철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장학생으로 선발된다. 대학입시를 앞둔 어느 날 김재철은 존경하던 은사 최석진(崔錫珍)선생에게 진로문제를 상담하게 되는데 이 때 그로부터 그의 일생을 결정 짓게 되는 말을 듣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낙후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오대양을 누빌 시기가 올 것이다. 생각해 봐라!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고, 지하자원도 없는데 뭘 가지고 세계에 나가 경쟁하겠느냐, 바다를 개척하는 길밖에 없다. 바다는 무진장한 자원의 보고다. 우리나라가 더 잘 살려면 우수한 젊은이들이 바다를 개발해야 한다.”,


“내가 너처럼 새로 시작하는 젊은 나이라면 서슴지 않고 바다에 미래를 걸겠다. 내가 제국대학이라는 명성만 믿고 지금의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다녔지만 청년시절의 꿈을 펼치지도 못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아라. 너는 이제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시야를 넓혀 장래를 설계해야 한다.”


은사님의 설득으로 청년 김재철은 1954년(20세) 국립수산대학(현, 부경대학교) 어로과(漁撈科)에 입학하게 된다. 청년 김재철은 국립수산 대학 졸업 후에도 여느 학생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당시 수산대학 졸업생들 대부분은 해무청, 수산시험장, 수산검사소, 어업조합 같은 곳에 취직하고, 그 중 똑똑한 친구들은 수산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청년 김재철은 수산고등학교 교사가 될 기회가 있었으나 이를 마다하고 위험과 고난으로 가득 찬 원양어선을 타기로 결심한다.

청년 김재철은 1958년 1월 졸업식을 한 달여 남겨놓고 우리나라 최초의 원양어선인 지남호(230톤급)의 실습항해사로서 사모아로 출어한다. 원양어선을 타겠다는 청년 김재철의 요청에 당시 제동산업 수산관계자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까지 졸업한 사람이 육상의 좋은 취직자리도 많을 텐데 무엇 하러 고기 배를 타려고 하느냐”며 처음에는 승선을 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년 김재철은 “보수는 바라지 않는다. 또한 항해 중에 사고를 당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서약까지 하고서야 간신히 승선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실습항해사라는 자격으로 승선했지만 정원 이외의 인원이었기 때문에 월급은 물론 침대도 없어 군 야전용 침대에서 잠을 자야 했다.


2. 김재철 회장의 창업과 기업가 정신


지남 2호 선장, 고려원양의 최연소 이사 등 10년 동안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1969년 4월 드디어 김재철은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자신의 회사 동원산업(주)을 창업한다. 창업 과정도 당시 다른 기업과는 사뭇 달랐다. 원양 어선 등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으나 그는 10년 동안 모아온 '1천만원’의 종자돈을 가지고 창업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국내 경제사정으로는 정부의 지불보증 없이 외국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들여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달랑'1천만원’의 돈으로 창업이 가능했던 것은 10년 동안 쌓아온 '신용’때문이었다. 김재철은 1969년 7월초 일본 '도쇼구(東食)’의 미국 현지법인인 '올림피아 트레이딩사’로부터 지불보증 없이 5백톤급 연승어선1) 제31동호와 제33동원호를 37만 달러의 현물차관으로 먼저 도입하고 대금은 어로작업을 하면서 상환하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김재철 회장의 기업가 정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의 기업가 정신은 그가 겪었던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김재철 회장이 겪었던 첫 번째 위기는 1차 석유 파동이었다. 1973년 10월 1차 석유파동으로 배럴당 2달러에 불과했던 유가는 1974년에는 11달러, 1975년에는 12달러로 치솟았다. 석유파동으로 한국경제는 경기침체, 물가상승, 국제수지악화라는 삼중고에 시달리게 되었고 불황의 여파는 1975년까지 이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세계 각국은 2백해리 경제수역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원양어선의 어로원가 가운데 유류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40% 이상이기 때문에 1차 석유파동과 연안어장 규제는 원양업계의 채산성을 극도로 악화시켰고 이로 인해 관련 기업들은 연이어 도산하였다. 김재철 회장도 1969년 회사를 시작할 때 어선을 분할 상환 식으로 구입하여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가의 상환과 선박운영의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1차 석유 파동이라는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그가 한 일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기존의 주력 사업이었던 참치잡이를 기지 어업에서 독항 어업으로 과감하게 전환시켰다. 해외기지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던 다양한 종류의 참치를 섭씨 영하 50도 이하로 냉동 유지되는 독항어선으로 교체 출항시켜 어가(漁價)가 높은 일본에 직접 판매토록 하였는데 이는 많은 부가가치가 창출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둘째, 사업 다각화의 일환으로 트롤어업2)을 시작하였다. 김재철 회장은 트롤어업이 연승어업보다 어획량과 수익성이 월등히 높을 뿐만 아니라 수산업의 국제화 추세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임을 간파하였든 것이다. 그 당시로는 파격이라 할 수 있는 선내에 공장시설을 갖춘 4천5백톤급 대형트롤선(동산호)을 도입하였다. 트롤어선을 도입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북양으로 진출, 대구, 명태, 가자미와 같이 바다 밑에 사는 저서어(底棲魚)를 대량 어획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장을 확대하여 북태평양 캄차카 해역에도 출어하였다. 특히 캄차가 지역에서는 3개월 만에 3,000톤 만선을 기록하였고 그 후에도 계속 조기 만선을 거듭하여 수산계의 혹심한 불황에도 불구하고 미쓰비시상사와 계약한 선가 상환기일을 하루도 어기지 않고 완불함으로써 양국 수산계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사업 다각화 차원에서 이루어진 트롤어업으로의 진출은 동원의 사세(社勢)를 확장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원을 열정과 도전의 정신으로 경기불황을 극복하는 기업으로 인식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두 번째 위기는 동원산업(주) 창사 10주년을 맞이한 1979년에 닥친 제2차 석유파동이었다. 1차 석유파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 독항어선과 크롤어선 도입이었다면 2차 석유파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국내 최초로 헬리콥터를 탑재한 탑재식 참치 선망어법3) 도입이었다. 탑재식 참치 선망어법은 미국에서도 1943년 이래 개발하기 위해서 노력을 계속해 왔으나 실패했었던 어법이었다. 이는 어업선진국의 배타적인 면이 강해서 기술 익히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배 1척 값이 3백톤급 참치 독항선 10여척 값에 해당될 만큼 고가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김재철 회장은 선망어업 개발에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1979년 1월 국내 최초로 헬리콥터 탑재식 선망어선인 코스타 데 마필호(807톤)를 3백2십만 달러에 도입하였다. 사운을 걸고 직접 승선한 김 재철 회장은 국내 최초로 괌에 기지를 설치하고 파푸아뉴기니아 해역의 참치선망 어업에 도전했다.


사주의 직접 승선은 여러 측면에서 효과가 발생시켰다. 첫째, 김재철 회장이 선장 출신이기 때문에 선박운영상 안전운항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선원들에게 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본인 역시 복잡한 선망어선의 기술적인 측면을 개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선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여 조업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각 분야의 기술자들이 함께 승선하였기 때문에 서로 간에 반목이 생길 소지가 많았으나 이를 불식시키고 오히려 협력체계를 다지는 조화로운 조업을 가능케 하였다. 넷째, 새로운 어구·어법의 운영상 문제점을 직접 파악하여 그때 그때 대책을 강구할 수 있었다. 다섯째, 경영자가 직접 승선함으로써 거래처에서 동원의 의지를 믿고 적극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곧 성과로 나타났다. 파푸아뉴기니아 근해에서 1회 투망에 2백50톤(당시 22만달러)정도의 어획을 올렸다. 김 재철 회장은 이를 통해 선망어선에 대한 매력을 더욱 가지게 되었다. 선망사업에 확신이 서자 태평양의 참치선망어장을 독무대로 만들고자 헬리콥터를 탑재한 선망선을 10 여 척으로 늘렸다. 흥미로운 점은 선명을 'Captin Kim’을 비롯하여 모두 Kim을 붙여 'Universe Kim’, 'World Kim’, 'Giant Kim’ 으로 붙였다는 것이다. 그가 이 사업에 얼마나 큰 관심과 열정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 여러 개의 낚시를 낙시줄(연승)을 얼레에 감아 물상을 따라서 감기와 풀기를 반복하여 고기를 잡는 배를 의미한다.
2)동력선으로 전개판이 딸린 자루 모양의 그물을 끌어서 대상물을 잡는 어업이다. 주요 대상 어종은 도미, 취치, 갈치, 가오리 새우 등이다.
3)다랑어를 잡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어망을 끄는 단정과 본선이 같이 어군을 포위한 뒤 그물 밑부분을 조여서 어획하는 방법이다.




3. 김재철 회장의 공헌


한 기업가의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정신이 진정으로 빛나게 될 때는 그것이 우리들 삶의 질에 영향을 미쳤을 때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기업가 정신은 단순히 한 개인의 만족으로 끝나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가 정신이 우리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기업가 정신에 시장을 읽는 통찰력이 가미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동원 김재철 회장은 기업가 정신과 함께 시장을 읽는 혜안을 가졌다.


1차 석유파동 때 독항어업 방식 및 트롤어업 방식을 과감히 도입한 것이라든지, 2차 석유 파동 때 헬리곱터 탑재식 참치 선망어업 도입한 것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김재철 회장의 시장을 보는 눈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들이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시장을 정확히 꽤뚫고 미래를 대비한 두 가지 사건은 1982년에 발생한다.


김재철회장은 1982년, 원양어업에서 식품가공업으로의 전환을 위해 중대한 결정을 한다. 이전까지 원어(原魚) 형태로 해외에 수출해 오던 참치를 통조림으로 가공해 국내시장에 선보이고 한 것이다. 1차 산업인 원양어업에서 2차 가공산업으로의 진출을 꾀하던 김 회장은 선진국의 식생활 패턴을 분석하고 제품개발에 대한 계획을 수립한 끝에 참치캔을 출시하기로 결정한다. 참치캔은 국민소득 2천불 이하인 나라에서는 팔리지 않는 선진국형 식품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수산캔이라 하면, 튜나 캔(Tuna Can)을 떠올릴 만큼 참치캔이 보편화되어 있었지만, 국내에는 수산캔이라 하면 꽁치캔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김 회장은 점차 선진국 형태로 변모해가는 국민들의 식생활 패턴을 감지함과 동시에, 1인당 GNP가 2,000달러 이상인 국가에서는 참치의 대중화가 가능하다라는 사실에 착안, 참치캔의 개발 및 출시에 나섰다. 참치캔은 당시 국내 소비자들에게 생소한 식품이었기에 김 회장은 광고와 시식회 등 적극적인 마케팅을 통해 참치캔이라는 식품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이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 1984년 추석명절부터 시판된 참치캔 선물세트이다. 이 해 추석에만 30만 세트 이상이 팔리며, 선물세트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참치캔은 백화점, 대형마트 등에서 명절 선물세트로 없어서는 안될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김재철 회장은 1988년에는 우리나라의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해안가에 1만2천평 규모의 어류 축양장과 4백80평의 종묘배양장 및 현대식 연구실 등 동양최대 규모의 양식장을 건립하였다. 이 양식장에서는 광어, 복어 등을 양식하는데 바닷물을 육상까지 끌어올린 후 육지에서 직접 바다 어패류를 양식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태풍과 같은 재해를 입지 않고 안전하게 양식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동원의 제주양식장은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의 전환에 큰 역할을 하였다.


“원양어업”에서 “식품가공업”으로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가 김재철 회장의 공헌이라 한다면 무언가 허전함이 남는다. 이는 개인의 치부(致富)로만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동원 그룹은 이런 변신으로 회사의 규모가 계속 커져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변신이 사세(社勢)를 확장시키는 역할만 했을까? 앞서도 말했지만 기업가적 정신이 진정으로 의미가 있으려면 그것이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를 해야 한다.


동원이 우리의 삶에 어떤 기여를 했을까? 나의 오래 기억부터 시작하자. 필자는 미국 유학시절 6년을 혼자 끼니를 해결했어야 했다. 배고팠던 유학 시절 나의 끼니를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이 '동원 캔’과 '구운 김’ 등이었다. 간편하고 싼 값에 부족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가 여러 인물들 중에서 김재철 회장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도 배고팠던 유학시절 나의 끼니 해결에 큰 도움을 주었던 참치 캔과 김을 도대체 누가,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나의 호기심이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각별한 인연까지 구태여 들추어 내지 않더라도 참치 캔이 우리의 삶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참치 캔은 우리의 일상적인 식생활을 한편으로는 풍요롭게 만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간편함을 선사해주었기 때문이다. 참치 캔은 주부들에게는 생선 비린내로부터 자유로움을 주었고, 가난한 자취생들에게는 저렴한 가격에 양질의 담백질과 함께 손쉽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게 해주었고, 서민들에게는 한 잔의 술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1982년에 태어난 참치 캔은 2014년 7월 기준으로 50억 캔 판매를 돌파했다. 이제는 쌀, 라면과 함께 참치 캔은 주부들 사이에 3대 비상 식품으로 꼽히고 있다 한다. 누군가가 1000-1500원이라는 부담 없는 가격에 양질의 수산품을 먹을 수 있게 했다면 이를 단순히 개인 부의 축적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투철한 기업가적 정신과 함께 시장을 보는 혜안을 가져 부를 축적한 기업인들은 많다. 그러나 대부분은 한 번의 성공으로 끝났거나 아니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시장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해 퇴보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혼자의 힘으로 창업을 해서 여러 위기를 겪으면 그 때마다 사업을 확장시키는 기업인은 흔치 않다. 이는 시장의 변화를 정확히 예측하는 안목 없이 단순히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기업가적 정신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동원 김 재철 회장은 그런 기업인이다.




김홍균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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