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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파병] 발표 : 국군의 베트남 파병의 경제적 의미

권혁철 | 2015-07-21 | 조회수: 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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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글

 

국군의 베트남(월남) 파병은 건군 이후 최초의 해외파병이었다. 1964년 9월 월남 파병이 이루어졌지만, 이 때는 의무병과 태권도 교관이 파견되었고, 전투부대는 파병되지 않았다. 전투부대가 파병된 것은 1년 후인 1965년부터였다. 64년 9월부터 휴전협정이 조인되는 73년 3월까지 8년 6개월 동안 총 32만4864명의 병력이 투입됐다.

 

세계 최강 군대인 미군도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었던 만큼 우리 국군도 악전고투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사자 5099명에 부상자도 1만1000명을 넘었다. 그런 속에서도 우리 국군은 해병 청룡부대의 '짜빈동 전투’1)와 같은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호치민은 “한국군을 만나면 무조건 피하라. 특히 (해병부대) '청룡’을 만나면 모든 작전을 취소하고 철수하여 병력과 장비 등 인민의 재산을 보존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한국군을 얼마나 두려워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국군의 파병은 군인 파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민간인과 기업의 진출도 활발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덕수 역시 민간인 신분으로 베트남에 들어가 생사를 넘나드는 고초를 겪는 장면이 나온다.

 

군인신분이었든 아니면 민간인이었든 목숨을 걸고 베트남에 갔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월남 파병은 대한민국에, 특히 대한민국 경제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1) 1967년 2월 15일 새벽 4시부터 4시간 동안 벌어진 전투로서 해병 1개 중대(해병 제1사단 제2연대 제3대대 11중대)가 월맹군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상대로 싸워 세계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경이적인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2400명 이상의 적군을 맞은 아군 해병 병력은 294명이었다. 제11중대는 적 확인사살 243명, 추정사살 60명, 포로 2명, 체코제 화염방사기 3문, 대전차 유탄발사기 5문, 기관총 2정, M15소총 11정, M56자동소총 17정, 각종 실탄 6000여 발, TNT 100개, 탄창52개, 기관단총 7정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아군은 전사 15명, 부상 33명의 희생을 치렀다. 제11중대 장병 전원은 일계급 특진을 하였고, 중대장과 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2. 월남 파병의 배경

 

(1) 미국 무상원조의 감소

 

정부 수립 이래 대한민국은 재정의 상당부분을 미국의 무상원조에 의존했다. 한국은 1945년부터 1962년까지 약 17년간 총액 31억여 달러의 미국 원조를 받는다. 이 규모는 연평균 GNP(국민총생산)의 약 12%에 달했으며, 연평균 총수입의 73%를 차지하는 막대한 것이었다. 이 기간 대외무역적자가 평균 GNP의 14.3% 정도였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의 대외무역적자의 대부분이 원조에 의해서 충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무상으로 도입된 원조물자의 판매대금인 이른바 '대충자금(對充資金)’은 파탄지경에 있었던 재정을 지탱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1958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국제수지가 사상 처음 적자를 기록하고, 해외에 방출한 달러가 미국의 금보유량에 육박하자 달러화에 대한 신뢰가 하락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에 미국은 국제수지대책의 일환으로 개도국에 대한 무상원조를 유상원조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지정학적인 위치 등의 이유로 단일국가로서는 가장 많은 무상원조를 받고 있던 한국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1957년 GNP의 17% 이상을 차지했던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는 1958년 14.1%, 1959년 10.1%, 이후 10% 이하로 급격히 낮아지게 된다.(아래 <표1> 참조) 미국의 이러한 원조정책의 전환은 우리나라 경제 전반이 불황의 국면에 접어들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표 1: 미국원조의 대 GNP 비율>

처: 이종훈, 한국경제론, 1980, p. 246/임종운,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이 국민경제에 미친 효과에 관한 연구, 1996, p. 11.

 

 

(2) 한국의 경제상황

 

1960년대 초기 한국의 경제상황은 참혹한 수준이었다. 6.25 전쟁을 치르며 그나마 있었던 산업시설은 붕괴되었고, 경제가 침체되어 경제성장의 기반을 형성할 아무 것도 없었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0~70달러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125개 국가 중에서도 최하위 국가에 속했다. 국민총생산의 대부분은 농업과 어업 부문에서 나왔으며, 제조업 부문은 14%도 채 되지 못했다.(아래 <표2> 참조)

 

<표2: 1955~1960년 한국경제 구조>

 

 

전체 노동력의 6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농업의 노동생산성이 극히 낮았던 것을 고려하면 농업종사자의 대부분이 은폐실업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도시지역의 공식 실업률은 16~17%에 달했다. 도시와 농촌을 모두 고려할 경우 전체 노동력의 약 절반 가까이가 사실상 실업상태에 있었다. 당시 한국의 노동공급 상황은 “무제한적” 노동공급 상태에 있다고 할 정도로 실업문제는 심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5.16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는 경제를 발전시키는 일이었다. 그것이 또한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서둘러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지만, 자원도 빈약하고 자본도 없는 나라에서 경제개발은 난제 중의 난제가 아닐 수 없었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핵심은 수입대체 공업화전략을 통한 자립경제기반 구축이었고 목표성장률은 연평균 7.1%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우선 국내시장의 협소함을 무시하고 추진하려했던 수입대체 공업화전략의 문제도 문제였지만, 자금조달의 문제는 더욱 큰 난관이 아닐 수 없었다. 1961년 11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아직 발표도 하지 않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들고 미국을 방문하여 지원을 얻어내려 했다. 하지만 미국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한국에는 경제지원을 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미국은 박정희 정권을 인정하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연쇄적으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금조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1961년 일반은행을 국유화하고 이어 1962년 6월 10일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고소득층의 유휴자금을 밖으로 끌어내 경제개발 계획 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자 한 것이다.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숨겨져 있던 돈이 예상했던 것처럼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중에 유동성부족 현상이 나타나 산업활동이 더욱 위축되고 국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국내자본 확보에 실패한 정부는 외자유치에 노력했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1962년도 외자유치 목표는 5천만 달러였으나, 실제 도입액은 목표의 12%에 불과한 6백만 달러에 그쳤다. 1963년에는 목표의 절반 정도만 도입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실시된 지 3년 후 목표성장률을 7.1%에서 5.0%로 하향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함께 수입대체 공업화전략을 수출주도형 전략으로 전환한다. 시행착오를 거쳐 수출주도형 전략으로 방향을 바꾸었지만, 자금조달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3) 안보상의 문제

 

이런 경제적인 목적 외에 월남 파병은 정치/군사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당시 상황에서 북한의 남침 의욕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주한미군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군사력이 여전히 열세인 상황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하거나 주한미군 병력이 크게 감축된다면 북한의 남침위협은 한국 안보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베트남전에 적극 개입하고 확전되면서 주한미군의 전용가능성이 높아졌고,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주한미군을 한반도에 잡아놓지 않으면 안 되는 안보상의 절박함도 월남파병을 하게 된 큰 원인이었다.

 

 

3. 베트남 파병의 경제적 효과: 베트남 특수(特需)

 

연간 2~3억 달러 수준이던 미국의 대한(對韓)원조가 1958년 이후 감소추세로 돌아서서 1964년이 되면 6.25전쟁 이후 최저수준인 1억2천만 달러까지 감소한다. 원조에 의존하던 경제를 더 이상은 지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대량실업과 빈곤, 그리고 저성장에 시달리던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그나마 지탱해주던 미국의 대한(對韓)원조까지 줄어들면서 한국경제는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히 필요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첫째, 한일 국교정상화, 둘째, 대규모 외국차관 도입, 셋째, 노동력의 해외 진출, 넷째, 베트남전 파병의 특수(特需)효과를 꾀함으로써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조국 근대화를 지상목표로 삼았던 당시 한국정부가 1964년 당시 1인당 GNP 103달러에 불과했던 상황에서(이때 미국 3,002달러, 일본 718달러, 필리핀 129달러) 베트남전 피병을 경제발전의 한 계기로 이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당시 이동원 외무부장관은 회고하고 있다.2)

 

우리나라가 베트남 파병으로 얻은 경제적 이익은 과연 얼마나 될까? 파월로 인한 경제적 효과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경제도약의 발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1960년~1964년까지의 실질 GDP 성장률이 5.6%였던데 반해, 1965년 이후 베트남 파병기간 동안의 실질 GDP 성장률은 10.0%에 달했다는 사실로부터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베트남 파병은 베트남 특수로 이어져 우리 경제가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1) 무역부문

 

당시의 유엔의 보고서가 1960년대 고도성장을 견인한 가장 큰 요인은 “지역 내 수출시장의 시기적절한 등장”이라고 밝혔듯이,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새로운 수출시장의 확보는 우리 경제성장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수출판로 확보에 애를 먹고 있던 한국 경제는 대 베트남 수출량이 급증하기 시작한 1964년~1965년을 계기로 크게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소비물자 수출에 치중했으나 1967년 이후에는 전쟁관련 물자의 수출이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1963년 630만 달러에 불과하던 수출액이 3년만인 1966년이 되면 4배에 가까운 2,360만 달러에 이르게 된다.3)

 

<표3: 한국의 대 베트남 수출, 1962-1970>(단위:백만 달러) 

동주, 베트남 파병이 한국경제의 성장과정에 미친 영향, 동남아시아 연구, 제11권 봄호, 2001, p. 6.

 

베트남 파병은 대 베트남 수출만 증가시킨 것이 아니다. 1965년 수출증가율은 전년도 대비 47.0% 증가하였으며, 특히 대미 수출증가율은 68.6%를 기록하였다. “당시 대미 수출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미국이 베트남 파병 요구에 응했던 한국에게만 독점적으로 부여한 우호적인 수출조건, 즉 보답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대미수출은 1964년 약 3,600만 달러에서 1972년 7억6,000만 달러로 21배 증가했다. “산업기반이 극히 취약했던 한국경제의 상황을 고려할 때, 급격한 대미수출 증가는 한국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한국의 전체 수출은 1965년 1억7500만 달러에서 1972년 16억2400만 달러로 연평균 37.5% 증가하였다.(<표4> 참조)

 

<표4: 한국의 대미 수출, 1963-1972> (단위: 백만 달러, %)


최동주, 베트남 파병이 한국경제의 성장과정에 미친 영향, 동남아시아 연구, 제11권 봄호, 2001, p. 7.

 

(2) 비무역부문

 

아래 <표5>에서 보듯이 베트남에는 군인만 파병된 것이 아니다. 군인은 연인원 35만 명이 파병되었고, 같은 기간 동안 영화 '국제시장’의 '덕수’처럼 기술근로자로 파견된 인원이 56,000여 명에 달했다.4)

 

<표5: 베트남 파병과 인력수출 추이> (단위: 백 명) 

 

 

한국군은 국내에서 불과 1달러60센트의 월급을 받았지만, 파병되었을 경우 평균 40달러 이상의 월급을 받았다. “한국군은 사령부가 직접 군인들의 봉급을 관리, 본국으로 송금시켜 저축률과 외환보유고를 늘려갔다. 1972년까지 약 2억 달러 이상이 송금”되었다. 또 전사나 부상자에 대한 보상금도 1972년까지 약 6천5백만 달러가 지급되었다.5)(<표6> 참조)

 

<표6: 파월 한국군의 송금내역, 1965-1972>(단위:백만 달러) 

최동주, 베트남 파병이 한국경제의 성장과정에 미친 영향, 동남아시아 연구, 제11권 봄호, 2001, p. 11.

 

베트남에 파견된 근로자들도 외화획득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베트남 주재 근로자 중 3분의 2 이상은 RMK-BRG, PAGE 등 외국업체에서 근무했고, 나머지는 한국계 건설업체에서 근무를 했다. 이들이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외화는 1972년까지 총 1억6,600만 달러였다. 이들 근로자들이 귀국할 때 평균 저축액이 5천 달러에서 8천 달러였으며, 1만 달러 이상을 저축한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6) (<표7> 참조)

 

<표7: 주월 한국근로자의 송금내역, 1965-1972> (단위:백만 달러)


동주, 베트남 파병이 한국경제의 성장과정에 미친 영향, 동남아시아 연구, 제11권 봄호, 2001, p. 13.

 

파월 기술자들이 베트남에 진출하자 1966년부터 용역업체들도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1966년 10개 업체가 진출한 것을 시작으로 점차 증가하여 1969년에는 56개 업체에 이르렀고, 그 후에는 감소 추세에 있다.(<표7> 참조)

 

건설부문의 진출도 이루어지는데, 여기에는 'Korea Only’라는 특이한 입찰방식까지 등장한다. 즉 정부의 건설공사입찰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 지원에 힘입어 한국만이 입찰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1966년 상반기에 현대건설의 준설사업, 대림산업의 항만공사를 선두로 삼환기업, 부흥건설, 공영건설 등 건설업체가 참여하였으며, 주로 축항, 도로개설, 병원, 주택, 학교 및 군시설 공사를 하였다.”7)


국내 기업들의 베트남 진출은 이후 대기업 형성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당시 베트남에 진출했던 현대건설, 한진상사 등이 베트남에서 자본축적의 기회를 잡았다. 현대건설은 베트남 항만공사에 참여하여 큰 부를 축적하면서 한국 건설업계 1위로 도약하였고, 여기서 축적한 기술력은 이후 중동건설 진출에 큰 힘이 되었다. 한진상사는 66년 이후 베트남의 미군 군수물자 하역 및 수송을 독점하면서 연간 2,500만 달러의 이익을 냈다. 한진상사는 베트남 진출을 계기로 대한항공을 흡수하는 등 이후 국내 최대의 수송회사로 성장한다.

 

이들 민간기업과 용역업체로부터 송금된 외화 총수입은 2억3,800만 달러에 달했다.(<표8> 참조)

 

<표8: 베트남 진출 기업 및 서비스업체로부터의 송금>(단위: 백만 달러) 

최동주, 베트남 파병이 한국경제의 성장과정에 미친 영향, 동남아시아 연구, 제11권 봄호, 2001, p. 12.
( )안의 숫자는 해당년도 진출기업 수

 

(3) 베트남 특수

 

이상에서 보았듯이 한국은 베트남전에 참전하면서 베트남 특수를 누리게 된다. 한 연구(박근호, 1993)는 베트남 특수를 베트남에 대한 수출, 한국군에 대한 군납 그리고 무역외수입(용역 및 건설군납, 군인 및 기술자 송금, 특별보상지원, 보험금) 등을 베트남 특수로 정의하고, 1965년부터 1972년까지 한국이 받은 베트남 특수 총액을 10억2200만 달러로 추정하고 있다. 또 다른 연구(최동주, 2001)는 베트남 특수 총액을 10억3,600만 달러로 보고 있다. 여기서는 최동주의 연구 결과를 따른다.

 

아래 <표9>은 앞서 논의된 것들을 종합한 것으로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경제적 이득을 종합하고 GNP 및 외환보유고에 미친 영향을 파악한 것이다. 아래에서 '베트남 수입’은 상업수출과 군납 등 무역부문, 군인급여, 근로자송금, 사상보상금, 서비스업, 건설업, 지급보험금 등 비무역부문을 종합한 것이다.

 

<표9: 베트남 특수와 GNP 및 외환보유고에 미친 영향>(단위: 백만 달러)

동주, 베트남 파병이 한국경제의 성장과정에 미친 영향, 동남아시아 연구, 제11권 봄호, 2001, p. 15.

 

<표9>에 따르면 국민총생산에서 베트남 특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2.07%, 외환보유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약 30%나 된다. 베트남 특수는 8년간 꾸준히 우리나라 경제에 커다란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무역외수지의 급증은 경상수지 적자 해소와 외환보유고 확충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군에 대한 지출과 파월장병 및 기술자의 송금, 외국으로부터 받은 운임 보험료 등이 급증하면서 무역외수지가 급증하여 1969년도에 최대 규모 약 2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외국의 무상원조와 기부금 및 구호물자 등이 지속적으로 도입되어 이전거래도 안정적으로 흑자를 기록하였다. 무역외수지와 이전거래의 증가는 당시 경상수지 적자를 감소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이로 인해 외환보유고도 증가하였다. 베트남 파병기간 동안 외환보유고는 지속적으로 늘어나면서 1965년 1억3800만 달러에서 1972년 약 7억 달러 수준으로 증가하였다.”

 

(4) 한국경제의 성장

 

앞의 <표10>은 순전히 베트남과의 관계에서 얻은 이익만을 표시한 것이라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외에도 베트남 파병이 직/간접적으로 우리 경제에 미친 영향은 크고도 많다. 앞에도 언급했지만, 베트남 파병은 대미수출의 급격한 증가를 가져온 원인이며, 대미수출은 대 베트남 수출액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또한 군사부문에의 원조 증가도 한국의 재정부담을 크게 덜어줌으로써 경제개발에 기여하게 된다. 미국은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대한군사원조를 급격히 삭감하기 시작했다. 1964년에는 전년 대비 약 6천만 달러나 감소시켰다. 파병 결정과 동시에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가 크게 늘어나 경제적 부담 경감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 상당한 이익을 얻게 된다. 1962년~1965년까지 총 9억800만 달러의 원조를 받아 연평균 2억2,700만 달러였는데 반해, 파병기간인 1966년~1971년에는 총 20억2,200만 달러의 원조를 받아 연평균 3억700만 달러를 받았다. 당시 우리나라의 총수출액이 1961년 1억4,600만 달러에 불과했고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1966년에도 2억5,000만 달러였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이 군사원조 금액이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한국은 이 자금을 가지고 방위산업을 육성하여 국가 경제 및 사회발전에 이바지하고 군 현대화계획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8)

 

베트남 파병 결정, 베트남 특수 및 그로부터 파생된 직/간접적인 경제적 효과로 인해 대한민국 경제는 경제기적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경이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베트남 파병은 경제기적의 도화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베트남 파병 전과 파병 후의 경제 지표를 보면 이러한 평가가 과장이 아님을 잘 알 수 있다. 1963년을 기준으로 할 때 파병 마지막인 1973년까지, 즉 1963년 이후 10년 만에 1인당 국민소득은 약 4배, 국민총생산액은 11배, 그리고 총수출액은 37배나 증가했다.

 

<표10: 베트남전 파병기간 동안의 한국경제 지표 변화>

임종운,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이 국민경제에 미친 효과에 관한 연구>, 1996, p. 52.
(  )안의 숫자는 1963년을 기준으로 해서 계산함.

 

 

1) 1967년 2월 15일 새벽 4시부터 4시간 동안 벌어진 전투로서 해병 1개 중대(해병 제1사단 제2연대 제3대대 11중대)가 월맹군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상대로 싸워 세계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경이적인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2400명 이상의 적군을 맞은 아군 해병 병력은 294명이었다. 제11중대는 적 확인사살 243명, 추정사살 60명, 포로 2명, 체코제 화염방사기 3문, 대전차 유탄발사기 5문, 기관총 2정, M15소총 11정, M56자동소총 17정, 각종 실탄 6000여 발, TNT 100개, 탄창52개, 기관단총 7정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아군은 전사 15명, 부상 33명의 희생을 치렀다. 제11중대 장병 전원은 일계급 특진을 하였고, 중대장과 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2) 이동섭, <그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샘터, 1993, pp. 469-473/ 임종운,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이 국민경제에 미친 효과에 관한 연구>, 1996, p. 18.
3) 최동주, 베트남 파병이 한국경제의 성장과정에 미친 영향, 동남아시아 연구, 제11권 봄호, 2001, p. 6.
4) “월급 350-400달러, 별도의 숙식비 180달러 포함해 총 530-580달러의 월급”, 동아일보, 1966년 4월 13일. 이는 당시 일반 근로자들이 받던 월급의 15배 정도였다.
5) 최동주, 베트남 파병이 한국경제의 성장과정에 미친 영향, 동남아시아 연구, 제11권 봄호, 2001, p. 12.
6) 최동주, 베트남 파병이 한국경제의 성장과정에 미친 영향, 동남아시아 연구, 제11권 봄호, 2001, p. 13.
7) 임종운,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이 국민경제에 미친 효과에 관한 연구>, 1996, p. 39.
8) 임종운,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이 국민경제에 미친 효과에 관한 연구>, 1996, p. 33.

 

 

 

4. 나가는 글

 

베트남 파병은 베트남 특수를 통해 경제성장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고, 경상수지 적자 해소 및 외환보유고 확충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함께 수출의 급격한 증가와 우리나라 기업들의 대기업으로의 성장은 우리나라 경제가 한 발짝 크게 도약하는 데 튼튼한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아울러 이러한 경제도약의 발판이 총알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선배 세대들의 피와 땀으로 마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참고문헌

 

박근호, 한국의 경제발전과 베트남전쟁, 1993.
임종운,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이 국민경제에 미친 효과에 관한 연구, 경성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조재호, 베트남 파병과 한국경제 성장, 사회과학연구, 제50집 1호, 2011, pp. 131-158.
최동주, 베트남 파병이 한국경제의 성장과정에 미친 영향, 동남아시아 연구, 제11권 봄호, 2001.

 

 

 

 

 


권혁철 |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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