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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과 모험의 기업가 정신: 쌍용 김성곤 회장

권혁철 | 2015-03-03 | 조회수: 4,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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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공공재라고?

 

지금도 전력 민영화 이야기만 나오면, 전력은 공공재이며 발전산업은 국가기간산업이기 때문에 정부 독점은 불가피하며 절대 민영화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들이 마치 자판기에서 물건 나오듯 자동적으로 튀어 나온다. 이렇듯 우리들 대부분이 전력은 공공재라고 인식하고 있고, 또 현실에서도 전력은 공기업인 한국전력공사가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의 전력에 관한 역사만 보더라도 민영화가 전혀 생뚱맞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력회사는 일제시대에 설립된 한성전기로 민간회사였다. 이 회사는 후에 경성전기주식회사가 되었다가 1961년 다른 전기회사들과 함께 한국전력주식회사로 통합되었고, 이후 1982년 한국전력공사로 재발족하게 된다. 전기가 처음부터 정부나 공기업에 의해 공급되었던 것이 아니라, 민간이 공급하던 것을 정부가 전력산업 혹은 전력공급 합리화를 이유로 인위적으로 독점 공기업 체제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전기가 공공재도 아닐뿐더러 정부나 공기업에 의해 독점적으로 공급될 이유도 없다는 말이다.

 

정부에 의해 배제되었던 민간의 발전사업 참여가 다시 가능해진 것은 1967년이었다. 전력사정이 좋지 않았던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에도 19년 동안이나 제한송전을 되풀이해오다 1964년에 이르러 제한송정이 해제되었다. 그러나 불붙기 시작한 산업화와 가전기기의 보급 등으로 전력수요가 해마다 30% 이상 급등하면서 1967년 하반기부터 다시 제한송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기업, 특히 에너지 소비가 많은 부문에서는 공장의 가동을 위해 원활한 전력수급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정부로서도 전력수급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민간에게 발전사업의 참여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멘트산업은 특히나 에너지 소비가 막대한 산업이다. 당시 강원도 동해에 대규모 시멘트공장을 건설하고 있던 쌍용양회는 이 공장을 안정적으로 가동하기 위해서는 자가발전 시설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발전회사인 동해전력을 세웠다. 발전회사를 설립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전력 공급의 안전도와 신뢰도는 물론이고, 연료유의 수송, 송전 가능성, 냉각수 취입의 난이도나 지반의 견고성 등 고려해야 할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종합적인 검토 끝에 동해전력은 울산 남화동을 후보지로 정하고, 1968년 제1호기를 착공하여 1970년에 준공하였다. 이어 1971년 3월 제2호기까지 준공하였다.

 

민간 발전회사의 출현에 대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독점의 특혜를 누리고 있던 기득권자들과 전력은 국가가 독점해야 한다는 사고를 가진 자들의 반발은 거셌다. 동해전력이 민간발전을 시작하자 발전과 송전을 독점하고 있던 한전은 물론 경제 관료들까지 나서서 거세게 반발했다.

 

민간발전 건설에 정치적 내막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오자 결국 정부는 1971년 말 동해전력과 경인화력, 호남전력 등 당시 민간발전 사업에 참여하고 있던 세 개의 회사를 한전이 인수하도록 한다. 우리나라에서 민간발전의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리고 정부 독점의 상태가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강원도 동해에 대규모 시멘트공장을 설립하고 필요한 에너지를 민간발전회사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인물이 쌍용그룹 창업주 성곡(省谷) 김성곤 회장이다. 그의 좌우명은 “일하자, 더욱 일하자, 한 없이 일하자. 나라와 겨레를 위해”라고 한다. 자신의 좌우명처럼 그는 평생을 일에 매진하며 다방면에 걸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김성곤 회장은 쌍용그룹을 세우고 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했던 뛰어난 기업인이자, 초대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역임하고 한일회담을 뒷받침하고 여야 의원 간 막후조정의 중심역할을 하기도 했던 유력한 정치인이었다. 또 그는 동양통신과 연합신문사를 경영했고, 성곡언론문화재단을 설립해 현역 언론인에게 외국 견문과 해외 유학의 길을 마련해 주었던 언론인이기도 했다. 또 운동을 좋아했던 그는 학창시절에는 축구와 유도 선수로 활약하였고, 대한유도회 회장과 대한체육회 고문을 역임하는 등 체육인으로도 많은 활약을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성곤 회장은 교육에도 큰 관심을 갖고 현풍중고를 설립하고 국민대학을 인수하여 운영하였고, 성곡학술문화재단을 설립하여 학자들에게 연구지원금을 지원했던 훌륭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승부욕이 남달리 강했던 늦둥이 막내아들

 

김성곤 회장은 1913년 8월 15일(음력 7월 14일) 경북 달성군 현풍면 하동 85에서 아버지 김광도, 어머니 김봉옥 사이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중키에 갸름한 몸집이었고, 약 50마지기 정도의 농사를 짓는 중농이었다. 김 회장의 아버지는 '남에게 베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몸소 실천하였다고 한다. '남에게 베풀며 살라’는 것이 김성곤 회장의 평생의 신념이었고, 평생을 통해 어려운 사람을 돕고 교육, 학술, 체육 등 다방면에 걸쳐 통 큰 지원과 성원을 아끼지 않았던 김 회장의 삶은 태도는 뿌리 없이 나온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외모와는 달리 어머니는 몸도 크고 기골이 남자 부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김성곤 회장이 어려서 부친이 돌아가신 후 고향인 달성에서 대구로 나와 여관을 경영할 때나 세무서와 경찰서 관계의 일처리에도 능란했다 한다. 또한 당시 쌀 구하기가 몹시 어려울 때임에도 쌀을 잘 구해와 경영하는 여관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김성곤 회장은 어머니를 닮아 어려서부터 몸집이 크고 부지런하고 활동적이었다고 하는데, 굴지의 대그룹을 일궈낸 그의 경력을 볼 때 외모와 성격만이 아니라 기업경영도 어머니로부터 많은 부분을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김성곤 회장은 어릴 때부터 승부욕이 강했다. 53세의 늦은 나이에 막내 김성곤을 얻은 부친은 여름이면 동네 아이들끼리 씨름을 시켜 이기는 아이에게는 큰 참외를 주고는 했는데, 김 회장은 자기보다 2~3세 나이 많은 아이들과 겨루어도 곧잘 이겨 부친을 기쁘게 했다. 자라면서 몸무게가 90kg에 이를 정도로 우람한 체격에 학창시절 내내 학비조달을 위해 아침마다 신문배달을 하며 체력을 단련한데다 운동에도 소질을 보였을 뿐 아니라 주량(酒量) 또한 남달랐던 호걸형 인물이었다.

술과 관련하여 재미난 일화가 있다. 지금의 연고전(고연전)에 해당되는 보연전(보성전문과 연희전문 체육대회)에서 두 학교의 학생들은 패싸움을 벌이는 것을 자랑으로 삼을 정도였다.

 

보전에 다니면서 학교의 유도부 주장을 맡고 있던 김성곤 회장은 서로가 사귀면 좋은 벗이 될 만한 처지에 그토록 싸움을 할 필요가 있느냐고 우선 보전의 친구들을 설득하고 다음에는 연전 쪽을 달래는 일을 혼자 도맡아서 해냈다. 모두들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에는 찬성이었지만, 문제는 그럴 경우 젊은 혈기에 너무 심심하다는 점이었다. 이에 김 회장은 '막걸리 마시기 대회’를 제안했다. 이후 보전은 안암동의 임업시험장으로 연전팀을 초청하고, 연전은 뒷동산에 보전팀을 초청하여 해마다 번갈아 가며 막걸리 마시기 대회를 계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전통의 보연전은 자연히 잠시 중단되었다고 한다.

 

중농의 집안으로 가난하지는 않았던 김 회장의 가정은 김 회장이 만 8세가 된 1921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김 회장 가족은 대구로 이사하여 어머니가 일본인 소유의 주택을 전세 내어 여관을 경영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었다. 김 회장은 고생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릴 때부터 돈을 아꼈으며, 스스로 신문배달을 하며 학비를 보태곤 했다. 이런 절약 정신은 그가 사업을 크게 벌여 대기업을 일구었어도 변하지 않고 평생 지속된다. 그는 헌 공책 뒷장을 찢어서 하루의 일과를 손수 메모하였고, 귀여운 손자들에게도 '휴지를 아껴 쓰라’는 잔소리를 싫증도 안 내고 되풀이했다. 또 큰 아들인 석원이 중고등학생일 때 용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무엇에 쓸 것인가를 반드시 묻고는 '영수증하고 돈 쓴 명세서를 반드시 기록해서 가지고 오라’는 다짐을 받았다. 단 한 푼도 헛되이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직원 10여명의 비누공장으로 시작한 사업

 

1937년 보성전문을 졸업하고 대구부청(大邱府廳)과 일본계 지방은행인 대구상공은행에서 잠시 근무했던 김성곤 회장은 1939년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개인사업을 시작한다. 그의 나이 27세였고, 첫 사업은 대구 칠성동에 있는 비누공장이었다. 이 비누공장은 원래 일본인이 운영하던 공장이었으나 경영난으로 도산을 했고, 그것을 한 조선인이 인수하였으나 그 역시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문을 닫은 상태에 있었다. 김성곤 회장은 이 비누공장을 지인(知人) 두 명(이들은 회사 설립 후 곧 자신들의 투자분을 회수함)과 함께 인수하면서 3인이 공동으로 투자했다는 의미에서 회사의 이름을 삼공유지합자회사(三共油脂合資會社)로 지었다. 직원 10여명으로 출발한 자그마한 사업이었다.

 

일본인도 망하고 또 그것을 인수했던 다른 인수자도 망할 정도로 사업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자명했다. 게다가 이미 조선 땅에는 일본의 대기업 제품이 진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품질 면에서 도저히 경쟁이 되지 않았다. 비누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무모한 도전으로 보였다.

 

하지만 김성곤 회장의 시각은 달랐다. 그의 기업가적 재질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가 중요산업 통제령을 발포하고 통제를 강화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모든 생활필수품의 공급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생산만 하면 판매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사전에 면밀히 조사하고 분석한 결과 진짜 문제는 생산과 판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료조달에 있다는 판단이 선 것이었다. 당시 원료는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던 유지공업협회로부터 배분을 받아야 했는데, 김성곤 회장은 어렵지만 이 부분만 극복하면 사업전망은 어둡지 않다고 보았다.

 

 

폐기물을 새로운 제품으로 활용

 

또한 일본 대기업 제품과의 경쟁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어차피 비누는 공급이 부족한 상태인데다가, 가난한 조선 사람들은 질보다는 값이 싼 세탁비누를 선호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결국 원료조달이었고, 원료의 확보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초창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안정적으로 원료를 조달할 수 있었다. 특히 해방 직후 다른 공장들이 원료공급이 되지 않아 애를 먹고 있을 때도 삼공유지는 생산을 멈추지 않았고, 이에 따라 비누 매출은 불티가 날 정도로 잘 팔렸고, 엄청난 이익을 보게 된다. 원료공급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김성곤 회장이 일제시대 만주지방에서 거둬들여 일본으로 수송하던 대두유(大豆油)가 전쟁 말기 수송 문제로 우리나라로 유입되자 이를 놓치지 않고 대량으로 확보해 두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자 원료의 보급로가 끊겨 대부분의 비누공장은 가동을 멈추었지만, 삼공유지만은 비축해 둔 원료로 계속 비누를 생산할 수 있었다. “날마다 입금되는 돈을 자루에 넣어 은행에 예금”해야 했을 정도로 대박이 난 것이다.

 

김 회장의 예상대로 문제는 생산과 판로보다는 원료의 조달에 있었고,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사업은 안정되는 듯 했지만, 또 다른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생산과 판로에는 예상대로 문제가 없었지만, 가격통제가 문제였다. 당시 비누가격은 공정가격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비누공장들은 큰 이익은커녕 현상유지에 급급한 실정이었다. 그는 이 문제를 종래에 폐기처분하였던 부산물을 새로운 제품으로 활용함으로써 극복해 나간다. 비누를 떠내고 난 뒤 가마솥 밑에 찌꺼기가 남는데, 이것을 이제까지는 폐기하였지만, 김 회장은 이를 이용하여 물비누라는 신제품으로 판매를 했던 것이다. 꼭두새벽부터 이 물비누를 사기 위해 양재기 등 용기를 든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고, 폐기처분하던 부산물은 엄청난 현금으로 돌아왔다.


 

금성방직의 설립

 

삼공유지에서 성공한 김성곤 회장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판단하기에 비누제조업은 중소기업이 경영하기에 알맞은 것일 뿐 아니라, 장차 경쟁도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되었기 때문에 다른 부문으로의 진출을 결심하게 된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부문은 방직산업이었다.

 

옷은 누구나 입어야 하고, 사회가 안정되고 소득이 증대될수록 의류에 대한 수요는 늘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김성곤 회장의 이러한 판단은 해방 직후 변변한 산업시설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산업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던 산업이 이른바 '삼백산업’이라 불리는 밀가루(제분), 설탕(제당), 면직물(면방직 공업)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시대의 흐름과 시대의 니즈(needs)를 제대로 파악한 선견지명이었다. 시대의 니즈를 파악하는 능력은 기업가적 재질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김 회장은 삼공유지에서 모은 돈을 모두 투자하여 금성방직을 설립하게 된다.

 

김성곤 회장의 기업가로서의 재능은 금성방직의 설립에서도 잘 드러난다. 8.15 해방 직후에 영등포와 안양역전에는 일본 동경방직 소유의 방적기가 방치되어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은 일본에 대한 연합군측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주요한 산업시설들을 한국으로 이전해 놓았었다. 동경방직도 폭격을 피해 방적기들을 한국으로 이송해 놓았다가 해방이 되자 가져가지 못하고 영등포와 안양역전에 야적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김 회장은 방치된 시설을 이용하여 공장을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관할관서인 미군정청과 교섭, 안양에 소재한 조선직물의 공장 건물을 임차받는다. 조선직물은 1932년 부지 3만평, 건평 1만평의 거대한 인견직물업체로 설립되었으나 경영이 지지부진하다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에는 조선비행기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이 회사의 공장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당시 김성곤 회장은 이 공장을 방직공장으로 활용하기로 마음먹고 미군정청과 교섭 끝에 공장의 일부인 3000평을 임차 받게 된 것이다. 공장을 임차한 김 회장은 기술자들을 대동하고 야적되어 있는 기계부품들을 불하받아 사용가능한 방적기 431대를 확보하여 조선직물공장 한 귀퉁이에 공장을 설립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금성방직은 본격적으로 생산을 하자마자 호황을 구가하게 된다. 설립 직후부터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해방 직후 섬유류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금성방직은 설립 2년만인 1950년에는 자본금이 10배 이상 불어나는 등 대규모 방직회사로 성장함으로써 훗날 쌍용그룹의 모체가 된다. 섬유류 공급이 크게 부족할 것을 예상하고 선제적으로 이 사업에 뛰어든 것은 기업가적 재능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일 것이다. 일제시대 때 세워진 경성방직 이후로는 해방 후 민간자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방직회사가 바로 금성방직이기 때문이다. 김 회장의 선견지명이 빛을 발한 것이다.

 

기업가로서의 그의 또 다른 재능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재주였다. 일제시대에 일본은 의도적으로 일본인들만이 기술을 독차지하도록 하고,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는 기술을 전수하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방직기술을 아는 한국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기술자들을 확보하여 공장을 설립하는 능력을 보였다. 특히 금성방직 설립 훨씬 이전부터 경성방직의 공장장으로서 방직 전문가가 되어 있던 김용린을 영입하여 금성방직의 공장장에 임명한 것은 그의 비상한 능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김용린은 경성방직을 창업한 김성수의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시작하여 막 발돋움을 시작한 금성방직은 커다란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바로 6.25가 발발한 것이다. 김성곤 회장은 직원들에게 창고에 있는 광목으로 자루를 만들어 각자 들고  갈 수 있는 만큼 식량과 광목을 가져가도록 하면서 급히 전액 인출한 돈을 나누어 주고는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공장에 남아 공장을 지키고 있던 김성곤 회장은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북한군은 그에게 자본가로서 그동안 노동자를 착취한 데 대한 자술서와 자기 비판문을 작성할 것을 강요했고, 그것도 날마다 되풀이 하도록 윽박질렀다. 며칠을 그렇게 보내던 김 회장은 탈출을 결심한다. 우선 식사를 끊은 후 지난 겨울 급성 맹장염으로 수술했던 자리를 슬슬 긁어 상처가 도지게 만들었다. 콧수염을 기른 김 회장을 영감동무라고 부르며 낯이 익은 북한 경비병이 왜 식사를 못하느냐고 묻자 김 회장은 긁어서 벌겋게 도진 수술 자리를 보여주면서 “수술한 자리에 상처가 도져서 견디기가 어렵다. 앞에 약방에 가서 약을 사 바르고 바로 오겠다.”고 대답했다. 머뭇거리는 경비병에게 김 회장은 팔뚝을 걷어붙이고 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그의 팔에는 미군이 야전용으로 쓰는 야광시계가 환하게 빛을 비치고 있었고, 경비병은 그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내 얼른 돌아올 테니 그동안 이 시계 차고 있으시오.”라면서 시계를 풀어주고 밖으로 나왔다. 대담한 탈출이었다. 이후 김 회장은 지인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양복은 아무 것이나 입더라도 시계는 야광을 차야 됩니다.”

 

전쟁의 와중에 금성방직 안양공장은 공장 근처를 나르던 미군기가 떨어뜨린 소이탄을 맞고 전 공장이 불에 타 버렸다. 김성곤 회장의 거의 전 재산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탈출 후 숨어 지내던 김 회장도 1.4후퇴를 당해서는 피난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잡혔다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피란을 가면서도 재기를 노리다

 

그렇게 경황이 없는 중에도 김성곤 회장은 전쟁 후의 재기를 생각했다. 미군기의 폭격으로 공장은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밖에 산더미처럼 쌓아두었던 원면(原綿) 더미는 용케 불길을 피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후방으로 이송시키는가 하는 것이었다. 화차(貨車)편을 찾았으나 후퇴로 경황이 없는 중에 화차가 있을 리 없었고 설혹 있다 하더라도 10만 파운드가 넘는 산더미 같은 원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사흘을 꼬박 기다려 화차를 구할 수 있었다. 전방에서 부상병을 싣고 대구 후방병원으로 가는 기차가 안양역에 정차한 것이다. 김 회장의 사정을 들은 기관사의 응낙으로 곧 원면을 가득 실은 화차 4량이 연결되었고, 원면은 무사히 대구에 도착했다. 김성곤 회장은 그 원면을 조선방직 대구공장에 넘기면서 현금 대신 반제품인 면사로 받는 임가공계약을 맺었다. 그 면사를 판매한 돈으로 그는 전쟁 후 제2의 창업을 실현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서울로 돌아온 김성곤 회장은 곧바로 금성방직의 복구작업에 돌입했다. 복구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유엔군은 대대적인 전후 복구를 위한 원조계획을 한국 정부와 협의하고 있었다. 기왕 재건할 바에야 전보다 훨씬 큰 규모로 키울 생각을 굳힌 김 회장은 은행 융자보다는 원조자금을 얻는 데 힘을 기울였다. 운크라(UNKRA) 계획으로 불린 원조자금은 1차로 생활필수품 수입에 1400만 달러, 공업재건비로 1060만 달러를 책정했다. 공업재건비 중에는 방직업 재건자금 279만 달러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방직공장은 부산의 조선, 대구의 삼호 및 내외와 대한, 광주의 전남, 인천의 동양, 그리고 서울의 경성과 안양의 금성이 규모가 큰 것들이었다. 그런데, 원조자금을 얻으려던 김성곤 회장의 계획에 커다란 장애물이 발생했다. 재건 자금을 배정함에 있어서 군사적인 안전도를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조건이 붙었고, 이에 따라 38도선에서 멀리 남쪽으로 떨어진 공장을 1차 대상으로 한다는 원칙이 한미 간에 합의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선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공장들을 서둘러 복구했다가 언제 또 다시 유린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른바 워커라인 이북 지역에 대한 전후복구사업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어 있었고, 안양에 위치한 금성방직은 원조자금 배정대상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위기였다. 이 위기를 김성곤 회장은 미군 당국을 설득함으로써 정면 돌파한다. 그가 내세운 주장은 두 가지다. 하나는 북한군에 의해 파괴된 것이 아니라 미군기의 폭격으로 타버린 금성방직은 마땅히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복구, 재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두 번째가 보다 결정적인데, 그는 안양공장이 원조대상에서 제외된다면 앞으로 미국의 한국 방위조약은 위약이나 다름없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금성방직이라는 한 기업이 원조를 받고 못 받고의 문제를 떠나서 미국의 방위공약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는 민감한 문제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고, 마침내 운크라는 워커라인 원칙을 수정하겠다고 후퇴했다. 금성은 94만2000달러의 재건자금을 받는 데 성공했다. 방직기 1만8000여추를 들여올 자금이었다. 이때가 53년 3월로 휴전회담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 원조자금으로 금성은 본격적인 재건을 하게 된다.

 

복구작업을 하는 동안 김회장과 직원들은 모두들 현장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때 김성곤 회장은 사무실에 온돌방 두 개를 만들고는 아예 이곳으로 이사를 해버린다. 풀 한포기 심을 만큼의 마당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온돌이라고는 하지만 피난살이와 다를 바 없는 임시거처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명륜동에 갖고 있던 50평짜리 “어렵게 은행 융자로 공장 짓는 사람이 집이나 크면 뭘 합니까? 우선 사장부터 검소해야 은행 융자도 받습니다.”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한여름이면 길가에 의자를 내놓고 부채로 더위를 식히기도 하고 한가할 때면 직원들과 장기판을 마주하기도 하면서 그 임시거처에서 4년 이상을 살았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렵게 타낸 운크라 자금으로 54년 봄에는 안양에 금성방직 공장을 세울 수 있었다. 폭격 당할 때의 거의 3배나 되는 대규모 공장이었다. 첫 제품은 '은하’라는 상표를 붙인 면사였다. 뒤이어 광목과 옥양목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였고, 물건은 없어서 못 팔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당시는 전쟁 후라 실수요자에게 공정가격으로 일정량을 팔고 난 나머지는 자유판매를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공정가격 자체가 충분한 이윤을 가산한 것이었다. 게다가 공정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팔 수 있는 자유판매도 있어 매상과 이익은 크게 늘었다. 58년 자유당의 권고로 국회에 진출하기까지 김성곤 회장은 금성을 일으켜 세우는 데 진력했다. 이렇게 많은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하면서 일군 기업이었기에 이후에 창업한 그 어떤 기업보다도 많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선착순으로 직원을 선발하다

 

경제에 관한 그의 관점은 다음의 발언에서 보듯이 시장경제적이었다. “물가가 올라서 야단인데 처음부터 자유시장 원칙을 지켰어야 옳았던 거요. 원가에 못 미치는 고시가격 때문에 정부는 세금도 못받고 기업은 이익도 낼 수 없고 소비자는 높은 물건값을 물게 되는 부조리와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 아닌가?...기업이 공장 문을 닫아버리면 2억 손해 보는 것으로 끝날 것을 조업단축을 하면 4억 손해를 보게 된다는 기업의 고충을 누가 알겠소?....물가문제를 푸는 원칙은 모든 공산품의 유통과 가격을 시장기능에 맡겨야 한다는 거요.”

 

방직 산업이 물론 기업에게는 큰돈을 벌게 해주었지만, 다른 한편 국민들에게는 당시 절대 부족했던 섬유류에 대한 공급을 증대시킴으로써 국민생활의 안정에 기여한 공로 역시 지대하다. 이것이 바로 기업이 사회에 공헌하는 첫 번째 길이다. 이와 더불어 일자리가 절대 부족했던 시절에 일자리를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좋은 일자리를 많이 제공해 주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래의 이야기는 근로자 선발과정에서 있었던 하나의 에피소드이지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기업의 사회적 공헌’이 과연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시사점도 제공한다고 할 것이다.

 

6.25 직후 금성방직의 시설 확장에 따른 종업원의 보충을 위해 여성근로자 2백여 명을 모집할 때의 일이다. 신문에 모집광고를 냈는데 이틀만에 2000명 가까운 지원자들이 몰려들어 실기나 면접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지경까지 되었다. 하는 수 없이 금성방직은 이들 지원자들을 일렬로 세워 키가 너무 작거나 너무 큰 여성들을 제외시키고, 심지어는 사다리통과 장애물달리기를 시켜 선발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키를 기준으로 한 이유는 방직기계의 높이에 맞추고자 했고, 서서 일하는 작업의 특성상 일정한 정도의 체력도 요구되었을 것이다. 선발이 끝난 후에도 지원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바람에 회사가 있는 안양지방에서는 숙식만 요구하는 가정부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2년간이나 무급 가정부를 썼다면서 금성방직 측에 감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당시의 취업사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잘 알려주는 일화이다.

 

한편, 요즘 이런 식으로 근로자를 선발한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런저런 차별을 했다고 여론의 뭇매를 맞았을 것이다. 여기서는 신장에 따른 차별이 있었고, 또 운동, 특히 장애물달리기를 잘하는지 여부에 따른 차별이 있으니 말이다. 아마도 여론은 이렇게 들끓을 것이다. 사주인 김성곤 회장이 운동을 좋아하기 때문에 사주(社主)의 개인적 취향에 맞춰 편파적으로 운동을 잘 하는 사람들만 선발을 했다고.

 

 

쌍용의 등장: “시멘트로 갑니다.”

 

“시멘트 사업을 할 겁니다.” 김성곤 회장의 한 마디였다. 회장의 이 말을 들은 측근들은 극구 반대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비료사업 쪽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사업 분야에 진출을 해야 하는데, 어디로 가면 좋을까를 묻는 김 회장의 물음에 측근들은 모두 안전한 비료사업 쪽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들은 시멘트 사업이 너무나 생소한 분야일 뿐 아니라, 천문학적 숫자의 초기 투자비용 부담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이런 측근들을 향해 김성곤 회장은 “시멘트로 갑니다”고 선언하였다. 1962년의 일이다. 김성곤 회장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당장에는 힘겨운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먼 장래를 내다보고 국가의 경제발전에 도움을 줄 업종을 선택하자는 것이 내 결심이다. 또 사업의 전망으로 보아도 앞으로 건설사업이 본격화되면 시멘트의 국내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고 장차에는 수출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결정이 나온 계기는 다음과 같다. 1961년 10월 경제기획원은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실시를 앞두고 '외자도입 대상사업자 선정을 위한 공고’를 발표한다. 외자도입사업에 참여할 민간기업을 선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시 정부는 외자도입 대상으로 비료, 제철, 인조섬유, 자동차, 시멘트 등 17개 사업을 확정하긴 했지만, 차관도입의 원칙만을 제시했을 뿐 그 구체적인 전망에 대해서는 불투명했다. 사업자가 능력껏 추진하면 지불보증 등으로 적극 도움을 줄 것이라는 말만 하는 정도였다. 앞서 말한 것처럼 김성곤 회장은 시멘트 사업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쌍용양회를 설립하고 외자도입 신청을 하였다.

 

시멘트 사업에는 모두 14명이 신청을 하였다. 1962년 1월 외자도입 심의위원회는 시멘트 사업에 쌍용을 포함한 3개 업체(쌍용양회, 한일시멘트, 중앙산업)를 선정하였다. 정부가 도움을 준다고는 했지만 모든 것은 사업자의 능력 여하에 사업의 운명이 달려 있는 셈이었다. 우선 해결할 문제는 차관선을 어디로 할 것인가였는데, 차관선을 정하는 데도 정부는 시한을 정해 주었다. 외자도입 승인으로부터 3개월 안에 차관계약을 맺고 정부에 신청을 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김성곤 회장은 2월 말 직원들을 서둘러 서독으로 보냈다. 차관조건 등 기술적인 문제들에 대한 타진 결과 서독의 훔볼트사가 우선순위 1번으로 정해졌다. 교섭 결과 훔볼트와 연산 40만톤 규모의 시멘트 플랜트 도입 계약을 맺은 것이 1962년 4월 1일이었다. 내자 3억원과 외자 650만 달러가 소요되는 대규모 공장이었다. 최종적인 조율을 거친 후 정부의 승인하에 649만5000달러의 차관계약을 정식으로 맺었다. 외자도입 1호 업자로 선정된 것이다. 내자는 당초의 3억원에서 4억원으로 늘어났다.

 

그 이후 쌍용은 확장을 거듭했다. 1965년 12월 쌍용은 정계와 산업계의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연산 200만톤 규모의 대규모 공장을 짓기 위한 미쓰비시와의 새로운 차관교섭을 맺는다. 외자 2900만 달러, 내자 46억 원을 들여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 삼화리에 건설하기로 한 새 공장의 규모는 연산 200만톤이며, 그중 70만톤을 수출해서 2800만 달러를 벌어들여 3200만 달러의 수출대체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나머지 130만톤은 벌크 생산체제로 해서 국내에 공급하기로 계획되었다.

 

당시의 시멘트 가격은 톤당 18달러인데 대단위 생산을 함으로써 생산비를 20% 절감하면 톤당 10달러81센트로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 쌍용의 계산이었다. 46억 원의 내자조달을 위해서는 30%를 쌍용이 부담하고 50%는 기존의 양회업자가 공동으로 출자하고 20%는 공모하기로 했다.

 

계산은 그렇게 나왔지만 소요자금의 규모로 보나 이제 겨우 의욕을 갖기 시작한 정도의 당시 투지환경으로 보아 연산 200만톤 규모의 새 공장 건설은 과욕이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당시 시멘트 사업이 대개 80만톤에서 100만톤에 이르는 것이 국제규모였기 때문에 200만톤이라는 쌍용의 새 프로젝트는 과잉시설이라는 것이 비판의 골자였다. 하지만 김 회장이 이 사업에서 가장 역점을 두었던 점은 싼 가격으로 대량의 시멘트를 수출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생산비를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는 대량 생산체계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이것은 그가 시멘트 사업에 진출할 때부터 갖고 있던 생각이었다. 그는 당초부터 이렇게 전망하고 있었다. “먼저 무슨 기업이든지 외국에 수출할 수 있는 구체적 단위의 공장을 세워야 한다. 구매력이 한정된 국내 시장에만 판로를 의존하면서 이윤이나 따먹자는 생각은 중소기업가들이나 할 일이고, 적어도 재벌급의 대기업가라면 시야를 해외로 돌려야 한다.”

 

그렇지만 정부 안에서조차 쌍용이 과욕을 부리고 있다는 비판 움직임이 일었다. 그 여파로 차관선인 미쓰비시의 차관을 승인해야 할 일본 정부가 까닭없이 최종 결정을 미루고 그 책임을 주일 한국대사관에 미루고 있었다. 김성곤 회장이 즉각 도쿄로 달려가 김동조 주일대사로 하여금 일본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하도록 한 뒤에야 차관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정도였다.

 

 

창조적 파괴: 금성방직 매각과 쌍용의 비상

 

업계와 정부의 이런 움직임으로 인해 김 회장이 처음에 구상했던 양회업자로부터의 내자 조달은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최초 46억 원이 들 것이라 예상했던 내자 소요액이 52억 원으로 늘어난데다 출자를 약속했던 업자들은 '쌍용에 투자하느니 차라리 그 돈을 자신들의 공장을 확장하는 데 써야겠다’면서 물러나 버렸다. 김성곤 회장 혼자의 힘으로 자금 조달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는 신규로 공장을 건설하려면 외자는 차관으로 충당하고 내자는 금융지원이라는 은행의 대출로 조달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했고, 그러한 상식적인 자금조달을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기업가의 능력으로 평가되는 세태였다. 더군다나 김 회장은 당시 집권여당인 공화당의 재정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쌍용이 당연히 은행대출로 내자를 조달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성곤 회장의 판단은 전혀 다른 방향이었고, 사람들은 그의 판단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팔 게 있으면 팔아야지......나라가 보증하는 빚을 얻어 쓰고 내자까지 정부에 기댄다면 세상이 웃지 않겠나?”

 

이 말은 김성곤 회장이 1948년 해방 후 설립된 최초의 방직회사로서 평생을 애지중지 키워오면서 자신의 튼튼한 기반이 되었던 금성방직을 매각한다는 뜻이었다. 금성 주식의 60%를 소유한 대주주였던 김 회장은 7년 만에 참석한 주주총회에서 설왕설래하는 주주들을 향해 금성을 매각하는 소회를 이렇게 피력했다. “금성을 팔기로 한 것은 딸자식을 시집보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섭섭하더라도 참고 내 결정에 따라주면 좋겠소.”

 

훗날 김성곤 회장은 금성을 팔기로 결정한 뒤 그것이 얼마나 외롭고 어려운 결단이었는가를 설명하면서 그가 사업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업을 일으켜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야 누구나 가지는 욕심이다. 그러나 돈만을 벌기 위해서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치고 망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건 욕심을 앞세웠기 때문이야. 사업을 하자면 정치권력과도 친해져야 하는 게 사실이지만 권력은 그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다. 사업은 그러나 권력과는 비교도 안 될 만치 생명이 긴 거야,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지만 날더러 말하라면 정권은 짧고 사업은 영원하다고 바꿔 말하고 싶다.

 

사업하는 사람 가운데는 그런 명언을 만들 재간이 없었을 뿐이지...그러나 사업의 생명을 길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투자가 필요한지 바깥사람들은 잘 모른다. 투자란 돈만이 아니다. 정성, 열정, 사람...이게 다 사업에 들어가는 투자라는 것을 알게 될 때에야 그 사업가는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보금자리와도 같았던 금성을 매각한 것은 그가 생각하는 사업의 생명을 길게 하기 위한 결단이고 투자였다. 나아가 어쩌면 한 발 더 도약하기 위한 창조적 파괴는 아닐까.

 


세계 제1의 시멘트 기업을 꿈꾸었지만......

 

김성곤 회장은 1962년 불입자금 3억원으로 쌍용양회를 설립하고, 그해 8월 강원도 영월군 서면 쌍용리('쌍용’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일대에 서독에서 들여온 연산 40만톤 규모의 시멘트 생산기계설치 등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게 된다. 영월공장은 64년 4월에 준공을 한 후 조업에 들어가 5월에 첫 제품을 출하한다. 6월에는 주한 유엔군에 5,900포대의 시멘트 군납이 시작되었고, 12월에는 베트남에 2,400여톤을 수출함으로써 시멘트 수출 원년의 기록을 세운다.

 

이렇게 시작된 쌍용시멘트는 1960년 대 중반을 넘기면 이미 국제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최소 단위라고 하는 1백만톤을 넘어 170만톤의 생산능력을 갖추게 된다. 업계에서는 공급과잉에 대한 우려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쌍용시멘트는 확장을 거듭하여 70년대 초반이 되면 연산 360만톤의 대규모 공장으로 성장한다.

 

'몇 년 만 지나면 국내 수요는 물론 수출도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했던 김성곤 회장의 안목은 70년대가 되면서 하나 둘씩 적중되었다. 국내의 수요가 급증함은 물론 국제 수요도 급증한다. 월남전이 마무리되어 남부 베트남과 북부 베트남이 전쟁 복구를 위해 막대한 건설 자재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인도네시아와 태국 등 동남아 각국의 시멘트 수요도 부쩍 늘어났다. 더구나 1973년에 들어와서는 시멘트 왕국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규모로 생산하고 수출했던 일본이 시멘트 부족으로 우리나라로부터 30만톤 내외의 시멘트를 수입하게 된다. 김성곤 회장의 장기적인 안목이 빛나는 대목이다.

 

쌍용양회를 설립하면서 김 회장은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에서 1등을 하는 자랑스러운 기업이 나와야 한다. 일본만 하더라도 서구의 자본주의를 도입한 지 1백년도 안되어서 선진공업국 못지않게 발전했고 조선(造船)부문 등에서는 세계 1등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기업이 나와야 하는데 자원이 풍부한 시멘트라면 가능하지 않겠느냐.’ 그는 이 부문에서 단연코 세계 정상급의 기업을 일구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다. 쌍용양회는 현재 동해와 영월, 문경, 광양 4개의 공장에서 연간 1,500만톤의 시멘트를 생산하고 있다. 내수뿐만 아니라 국내 수출량의 50%를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현재의 쌍용양회는 김성곤 회장 일가와는 무관한 기업이 되었다. 1975년 김성곤 회장이 타계한 후 경영을 이어 받은 김석원 회장의 쌍용그룹은 한 때 10대 재벌에 속할 정도의 대그룹으로 성장했으나, 1990년대 말 경제위기를 계기로 어려움에 처하면서 해체되고 만다. 쌍용그룹의 모기업이었던 쌍용양회만 만고 그룹의 주축을 이루었던 쌍용건설, 쌍용정유(현 에쓰오일), 쌍용중공업(현 STX)이 모두 그룹에서 분리됐다. 또 창업자인 김성곤 회장 일가도 지분을 대부분 처분해 쌍용그룹의 지배구조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쌍용양회는 현재 채권단에 의해 매각작업 진행 중에 있다. 김성곤 회장으로서는 통탄할 일일 것이다.

 

 

도전과 모험정신, 창의성과 혁신이 기업가 정신의 요체

 

혹자는 김성곤 회장의 시멘트 사업 진출에 대해 “국가 기간산업 중의 노다지로 꼽힌 시멘트사업” 혹은 “시멘트는 경제개발계획사업의 추진과 함께 불같은 번창이 확약된 분야”에 진출한 것일 뿐이라고 폄하한다. 다시 말해 쌍용이 시멘트 사업에 진출한 것은 이른바 '땅 짚고 헤엄치기’식의 손쉬운 결정이었으며, 성공은 불 보듯 뻔했다는 식의 평가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는 쌍용그룹의 시멘트사업이 한참 성공하고 난 뒤에 나온 사후평가일 뿐이다. 상황이 지나고 나면 누구나 다 할 수 있었다는 식의 그렇고 그런 평가에 불과하다.

 

사실은 그 반대이다. 김성곤 회장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걸었다. 앞에서 보듯이 시멘트 사업에 진출을 결심할 당시에는 그것이 '노다지’일지 '쪽박’일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의 힘겨운 결단이었다. 십 수 년을 함께 해온 측근들도 반대했다. 또 정부는 시멘트를 전략산업으로 책정은 했지만 그에 대한 수요는 전혀 예측을 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도 대규모의 시멘트 공장 건설에 대해 여러 경로를 통해 반대의견을 전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린 김 회장의 결단은 그야말로 기업가로서의 '그 무엇’이 없이는 어려운 고독한 결단이었다. 여기서 '그 무엇’이란 바로 '기업가 정신’을 말한다.

 

기업가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도전과 모험정신, 창의성과 혁신을 그 요체로 꼽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불확실성 하에서의 의사결정을 통하여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고 이를 끝까지 추진하는 능력을 기업가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김성곤 회장의 시멘트 사업 진출은 기업가 정신이 발현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측근들의 반대와 예상되는 자금 조달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전혀 생소한 분야를 개척하여 나가는 것이야말로 도전과 모험정신이라는 기업가 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이 도전과 모험을 요체로 하는 기업가 정신을 요행이나 바라고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무모함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기업가 정신을 뒷받침하는 것은 면밀한 조사와 자료 수집 및 분석이다. 쌍용이 시멘트 사업에 진출하기 전 김 회장은 이미 시멘트의 원료가 되는 석회석이 우리나라에 무진장으로 묻혀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시멘트 사업의 전망에 대해서 필요한 자료들을 꼼꼼하게 준비하고 분석하고 있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시멘트는 기본 투자액이 상당히 크며 당장에는 내수나 수출 모두 확실한 전망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이 약점이기는 하지만, 일단 몇 해만 어려움을 견디면 국내외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 김 회장은 주저 없이 시멘트 사업에 매진하게 된다. 신중하게 결단을 내리되, 결정된 이상 신속하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김성곤 회장의 특징이었다.

 

 

촌티마저도 멋있었던 큰 인물 김성곤

 

정치에도 참여하여 자유당의 국회의원을 지냈고, 공화당에서 중책을 맡기도 했던 김성곤 회장은 다방면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보였고, 호방했던 기풍, 소박하고 강건한 성품의 그릇이 큰 인물로서 크고 검은 얼굴에 고급 옷이 어울리지 않는 촌티나는 모습마저도 뭇 사람들이 흠모하고 따랐다. 1975년 2월 25일 모교인 고려대의 고우(高友)회장 자격으로 졸업식 축사를 하기로 했지만, 축사를 하지 못하고 쓰러진 채 그날 저녁 63세를 일기로 유언 한마디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63년을 사는 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가는 세상을 떠난 지 8개월 후 김성곤 회장의 유택(幽宅) 앞에 세워진 신도비(神道碑)의 비문이 대신 말해 주고 있다. “여기 아람드리 큰 나무가 있어 가지 무성하여 그늘 아래 쉬는 이들이 많고 화사한 꽃에는 벌 나비들 꿀을 캐며 풍성하게 달린 열매 찾는 이도 많다가 그 나무 문득 넘어지자 만인이 놀라며 그립고 아쉬움을 달랠 길 없다....”

 

 

 

권혁철 |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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